욥기 13장


1. 권한도 능력도 없는 말단 직원이 뻔한 설명을 계속하면 민원을 제기한 사람은 속이 터진다. 그래서 하는 말이 ‘그 정도는 나도 안다. 답답한 소리 말고 비켜라’(1-2)는 것이다. 욥이 친구들을 대하는 장면이 그런 셈이다. 이제 욥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과 직접 부딪혀야(3): 친구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로하려고 찾아온 친구들의 말이 위로는커녕 답답하기만 하다. 돕는다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화만 더 돋울 수도 있으니 함께 아파해주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다.

2. 쓸데없는 의원이란 병을 고칠 능력이 없는 의원이란 말이다. 의사가 병을 못 고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다고 하든가, 자신은 고칠 수 없으니 다른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든지, 다른 병원에 가보라고 해야 할텐데 욥이 보기에 이 엉터리 의사들은 거짓말이나 하고 다른 치료방법을 무시하기만 한다.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들이 한약이라면 무조건 쳐다보지 않거나 민간요법을 우습게 아는 것도 그런 탓 아닐까? 소위 전문가들이 비전문가들의 얘기를 쉽게 무시하는 것도 이런 탓이다. 자신이 전공한 분야 이외에도 진리는 아주 넓게 퍼져있다는 것을 알아야 이런 협소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3. 욥의 친구들이 진정 지혜롭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입을 벌리기보다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분야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는 것만 말하고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용히 있는 것이 지혜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우아한 부인이 실제로는 무식하고 교양없음을 드러내는 데에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마디면 된다.

4. 친구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욥이 보기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고 하는 말이 온통 불의, 궤휼이다(7).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불의한 말을 하게 되는 수가 있을까?

    무식이 문제다: 예수를 오해한 사울처럼 몰라서 그렇게 된다. 만약 친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않은 욥을 하나님과 대적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책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전쟁과 싸움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여졌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분을 푼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의도적으로 그런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지만 알지 못해서 그런 수가 참으로 많았다(눅 23:34).

5. ‘하나님께 맹세할 수 있나?’ ‘하나님께서 조사해도 자신있지(9)?’ 이렇게 다짐을 받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모르고 행할 때: 결국 위의 대답과 동일하다. 자신이 거짓을 말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다짐을 받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욥이 보기에는 이 친구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것이 틀림없는데...

6. 친구들이 행한 ‘하나님을 위한 불의나 궤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욥의 죄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는 말: 실제로 이 세상에 수 많은 부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한다면(7-8) 하나님께 아부하느라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욥이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이 세상에도 모순과 부조리가 있더라는 것이다.

7. ‘재’와 ‘토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별로 소용이 없는 것: 불이 다 타고나면 재를 치우는 일만 남는다. 흙으로 쌓은 토성은 허물어지기 쉽다는 뜻이다. 돌로 쌓은 성과 비교해보라. 격언이란 촌철살인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데 너희가 그것을 재와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로 만들어버렸다.

8. 14-15절의 뜻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13b(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와 15b(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를 참고해서 생각하면 핵심이 무엇인가?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겠다’는 뜻: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서 해답을 얻을테니 너희는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만 두라는 것이다.

9. 16절의 ‘이것’은 앞절의 내용을 가리킨다(원어상의 순서는 ‘이것이...’이 ‘사곡한 자는...’보다 앞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면 사곡한 자가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자기 구원의 이유가 되는가?

    자신은 전혀 사곡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아뢰어 자신의 무죄함을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구원의 확신이랄까? 성도는 이런 확신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10. 욥이 친구들에게 입을 열면 책망, 반박, 열변을 토한다. 그 입을 하나님에게 돌리면?

    기도를 드린다(20-28): 욥의 입에서 나온 말이 원망이 아닌 것이 복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겨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11. 하나님께서 거두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

    주의 손과 위엄(21): 고함치는 어른에게 어린 아이가 ‘때리지 마시고 겁주지 마세요, 나는 겁이 많아요’ 하는 셈이다. 혹은 ‘소리 지르지 마세요, 살살 얘기 해도 들을께요’ 하는 식이다(= 9:34).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

12.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회를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시면 꼭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정말 이렇게 고난을 당할만큼 제 죄가 많습니까?(23)

13.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다닐 때 다윗은 자신을 죽은 개라고 표현했다(삼상 24:14). 욥은 자신을 어디에 비유하는가?

    날리는 낙엽, 마른 검불(25), 썩은 물건, 좀먹은 의복(28): 이렇게 하찮은 나를 왜 쫓아 다니십니까(25)?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에게 욥은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25절의 ‘따르다’는 말은 사냥개가 사냥을 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단어다. 14장 1-2에서 계속된다.

< 소감 > 욥의 친구들은 선무당이나 돌팔이 의사같다. 반면에 욥은 감히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말씀해달라는 용기를 지녔다. 성도들도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기 전에 욥과 같은 당당함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욥이 절대적으로 당당하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어린 아이같은 자세로 아버지께 따지고 드는 것이다. 자신의 부정함과 무능함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인정하면서 항변하는 자세는 착하면서도 당당한 어린 아들의 모습이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