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2장


1. 2-3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도 안다(= 그래 잘 났다): 소발의 비난에 대해서 ‘너희’라고 대답하는 것은 세 친구가 한통속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라는 말은 너희가 지혜를 독점하였다는 뜻으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느냐는 비난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그 정도 지혜를 가지고 마치 하나님인양 떠드느냐? 소발이 자신을 들나귀로 비꼬았기 때문이다(11:12). 소발이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를 찬양하는 것은 옳다. 문제는 욥의 미련함을 물고 늘어진 것이 잘못이다.

2.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욥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가?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자(4): 그러므로 의롭고 순전한 자이다. 이런 자의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 이런 사람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버티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3. 욥이나 친구들의 지혜는 어쩌면 대동소이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를까? [참고: 5절의 현대인의 성경 ‘평안하게 사는 자는 재앙당한 자를 멸시하고 재앙은 곧 넘어지려는 자를 기다리고 있구나’]

    평안한 자와 재앙을 당한 자의 차이(5): 재앙을 당해서 형편 없는 이웃도 실상 나와 별반 다르지 않거나, 못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평안한 자의 위로가 오히려 넘어지는 자를 떠밀어버릴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욥의 반격은 “그렇게 잘 났으면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한 이유를 설명해보라”는 것이다(6). 물론 친구들은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 우리는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인과응보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눈에 모순, 역설, 부조리처럼 보이는 것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남의 자식이 10등을 하면 잘 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내 자식이 10등을 하면 야단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수도 있다.

5. 새가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우스개로 뭐라고 하는가?

    새대가리, 닭대가리! 말하자면 친구들을 향해서 ‘야, 이 돌대가리들아!’ 하는 셈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불행하게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현실에는 너무 많다!

6. 친구들을 향해서 ‘물어보라’고 하는 대상이 하나가 좀 특이한데?

    땅(8): 짐승, 새(7), 고기(8)들 중에 땅이 들어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마도 ‘땅에 기는 것들’을 의미하는 말 아닐까?

7. 자연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 수 있는 것을 일반(자연)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모든 만물이 다 아는데(7-12) 도대체 왜 이런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느냐?

8. 생물에게 혼이 있다고(10)?

    이런 표현 하나를 보고 생물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떤 역본은 ‘만물의 생명과 전 인류의 호흡’이라고 번역했다. 혼이라고 번역된 ‘네페쉬’는 생명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 해석이 어려운 말이지만 성경이 기본적으로 생물에게 영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9.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7-25). 이 주제와 엉뚱하게 보이는 구절이 있다면?

    11-12절: 만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은 입이 맛을 변별하거나 귀가 소리를 듣고 분간하는 것처럼 쉽게 알 수 있는 일 아니냐? 그리고 그 정도는 지혜는 늙은 자에게, 혹은 장수하는 자에게는 기본이 아니냐? 그런 지식을 가지고 그렇게 폼을 잡고 그러냐?

10. 1-12절은 악인들의 흥왕을 예시하며 소발의 인과응보적 사고를 반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3-25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절대주권을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소발의 잘난 체 하는 것에 대한 답이 될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는 것이다.

11.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예만 들었다(17-25).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살리시고, 세우시는, 좋은 측면이 더 많을텐데 왜 이런 예를 들었을까?

    욥 자신이 죄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셈이다. 친구들은 정의로운 세상(권선징악, 신상필벌)을 노래하는데 반해서 욥은 부조리하고 모순덩어리 세상만 보이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탄식과 저항은 깊은 고난의 심연에서 분출되어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마저도 막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12. 모사, 재판장, 열왕, 제사장, 권력있는 자, 방백들, 두목들이란 표현(17-25)은 아무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높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의 옷을 함부로 벗길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18절의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왕복을 벗기고 다른 옷(포승줄일 수도)을 입히는 것:

13. 충성된 자의 말(馬?, 言?)을 없이 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의미할까?

    충성된 자란 가장 높은 자의 부관이나 참모나 비서(대변인)란 뜻이다. 이런 사람은 상관을 대신하여 말이 많다. 때로는 대신 해명도 해야 하고, 설명도 해야 하고 전달도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의 말을 없애버리면?

    요약하면: 엘리바스의 오랜 경험(5:8-27), 빌닷의 흑백논리(8:1-22), 소발의 정통적 교리(11:7-12)에 대한 욥의 반박(12:1-13:19)과 탄원(13:30-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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