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1장


1. 세 친구가 욥에게 말한 서두를 비교해보자. 누가 제일 과격한가?

    1) 엘리바스(4: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 이런 말을 하면 짜증스럽겠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2) 빌닷(8: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하겠는가? 너무 거칠지 않느냐?
    3) 소발(11:2-3):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 그런 헛소리를 듣고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세 번째로 입을 연 소발이 앞의 다른 친구들보다 더 과격하다(2-3): 엘리바스는 비교적 점잖은 사람 같은데 소발은 과격하고 오만한 사람같아 보인다.

2. 소발이 욥을 책망하는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말이 많다(2): 실제로 욥의 답변이 길긴 길었다(9-10장).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고래로 말이 많은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던가? 잠 10:19(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전 5:2-3(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등도 말이 많은 자를 어리석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소발은 욥을 바보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웅변은 금이요 침묵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적절하게 말을 잘 해야 한다.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되는 일은 적다. 세일즈맨을 생각해보라.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서 인사도 없이 서 있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별 의미가 없어도 말을 주고 받으면 분위기가 좋아진다. 적절하게 말을 잘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일이 더 현명해 보인다. 언어의 중요한 기능 중에는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기능도 있다.)

3. 소발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

    욥의 결백하다는 주장(4):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 오묘함으로 그 앞에서 결백하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큰 벌을 받을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벌하심이 혹시 잘못이 있다고 해도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욥의 죄보다는 가볍단다. 이렇게 성도를 비난하기는 쉽지만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욥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소발도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만약 소발이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말을 들었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성도는 소발의 비난보다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욥의 자랑에 더 귀를 기울이고 따라할 수 있어야 한다.

4. 어려움에 처한 친구에게 행한 가장 과격한 표현을 찾는다면?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6b): 설령 욥이 잘못해서 벌을 받는 중이라고 해도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5.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일갈하는 것은 욥의 어떤 말(10장) 때문일까?

    주께서 지으신 것을 이유도 없이 부수다니(10:3, 8, 9, 11)?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는 선한 목적이 있을 터인데 이유도 없이(=결백한 나를) 어떻게 나를 이럴 수가 있느냐는 욥의 말에 대해서 ‘네가 감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6. 소발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7-10)?

    사람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위대하신 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너무나 정확하지만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대하다고 찬양만 한다면 우리를 향해서 애틋한 사랑을 보내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재력이나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완전하지 않다. 욥을 앞에 두고 이렇게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낙제점이다. 바울이 엡 3:18-19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기를 구하였던 것과 비교해보라.

7. 12절의 ‘허망한 사람’은 원어상으로는 ‘골빈 사람’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골빈 사람이 지혜를 갖기 바라는 것보다는 들나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는 말이다. 이 말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말이야 맞다, 맞는 말이 사람을 잡는다: 바르게 정죄하는 것보다 무식하게 사랑하는 것이 낫다. 적어도 형제요, 친구라면 말이다.

8. 소발의 견해에 따르면 어떻게 하면 욥이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회개하면: 마음을 바르게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면(13-14) 환난에서 깨끗이 벗어날 것이다(15-16).

9. 소발의 말, 특히 13-20절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후일 하나님께 책망을 듣는가?

    없다: 나름대로 최고의 지식을 가진 자들이 하는 말인데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이 옳다고 하는 것(42:7)은 고난 당하는 친구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난 당하는 형제를 질책하고 원인을 분석해서 정죄하기보다는 함께 아파하든지 아니면 조용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이다.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황에 알맞게 적용하는 것이다. 욥의 경우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 자신이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해답 아닐까?
    첨(諂): 아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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