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장


[ 3:22b-25 ]
1.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는 누구와 대조를 이루는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대조를 이루고 다음 절의 ‘부끄러운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우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우상을 따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부끄러움을 당한다(25절, 수치 중에 눕고, 수욕에 덮이울 것): 아무런 능력도 없는 우상에게 재물과 자녀까지 다 빼앗겼기 때문이다(24절).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사이비에 빠져 재산과 가족을 다 잃어버린 사람이 당하는 수치가 바로 그것이다.

예레미야 4장

1. 앞 장의 끝에 있는 기도를 보면 이스라엘이 돌아온 것 같은데?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 아니고 어디로 돌아갔다는 말인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하고 뭔가 다른 시도를 했는데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도 그 중의 한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믿고 또 다른 방법도 시도한 모양이다. 아직도 버리지 않은 가증한 것이 있고, 마음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3-4절의 내용을 보아서도 그렇다.

2.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2)?

    열방이 복을 받고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을 보고(여기서는 그런 말씀이 생략되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런가?) 열방이 하나님께 복을 빌 것이고 그래서 복을 받으면 하나님을 자랑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복의 근원이 되리라던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3. 묵은 땅이나 가시덤불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우상숭배, 고정관념, 패배의식, 자기비하, 물질만능...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데 장애가 되는 묵은 땅이나 가시덤불이다.

4. ‘마음 가죽을 베라’는 것은 무엇을 비판하는 셈인가?

    육체에 할례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형식적인 신앙: 마음(신앙의 좌소, 지, 정, 의를 다함)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은 상태에서 할례라는 의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이다(롬 2:28-29). 제대로 된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다.

5.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유다’라는 표현이 계속 쓰였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유다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이 말이 에스라서에 많이 나오지만 역사적인 순서로 보면 예레미야가 먼저다. 혹시 유다와 유다인이라는 두 표현 사이에 차이점이 있을까?

    북 이스라엘 사람을 포함한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 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는 이스라엘의 두 나라 중에서 남쪽 나라를 유다라고 한다.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의 일부가 유다에 편입되기도 하고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다. 이들을 통칭해서 부를 때 유다인(그러니까 이스라엘 출신도 포함해서 유다 백성들)이라고 부른 것 같다. 신약에서는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6. 원래 나팔을 부는 것은 출전이나 공격을 알리는 신호다. 여기서는(5절)?

    요즈음의 공습경보나 마찬가지다. 급히 대피하라는 경고이다. 6절의 기호를 세우는 것도 동일하게 위험을 알리는 신호이다. 아마도 봉화와 같은 신호였을 것이다.

7.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여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 더욱 상황이 나빠지면?

    29절: 성에서 나와서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른다.

8. 열방을 멸하는 자를 수풀에서 나온 사자에 비유하는 것은 어떤 점을 강조하는 의도인가?

    사냥을 완료하기 전에는 수풀로 들어가지 않는다. 배부른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사냥을 하려고 수풀에서 나온 사자는 하다못해 토끼 한 마리라도 잡아야 돌아간다. 사자에게 찢기는 처참함도 당연히 포함되었겠지만.

9. 왕과 방백들이 실심하는데 제사장과 선지자는 왜 놀랄까?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던 제사장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면서 놀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렇게 행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성경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지만 그들은 가짜 제사장이요 거짓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진짜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슬프고 아프다(19)!

10. 아무리 선지자지만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도 되나? ‘여호와께서... 속이셨나이다’

    그렇게 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은 하나님과 선지자(예레미야)의 교제가 얼마나 밀접한 것이었나를 보여준다. 아무나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아픔과 하나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하는 선지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예루살렘에 평강이 있으리라’고 한 것은 어쩌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외쳐도 말리지 않으시더니 결국은 이렇게 징계를 하고야 맙니까?

11. 본문을 근거로 바람을 두 종류로 분류한다면?

    파멸의 바람과 추수용 바람: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은 농작물을 시들게 만들어 버린다. 반면에 추수 시절에 부는 산들바람은 알곡을 추려내는데 아주 유용한 바람이다.

12. 대적이 뜨거운 바람같이, 구름같이, 회리바람같이, 독수리같이(11-13)) 쳐들어오는 목적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기 위함이다(16). 표면상으로는 바벨론의 정복욕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면적,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유다의 마음의 악한 생각(14), 하나님을 거역함(17), 유다의 길과 행사(18): 무서운 징계는 결국은 나(하나님)를 위하여(12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미리 알고 돌이키면 되는데... 선지자의 아픔이 여기에 있다. 외쳐도 듣지 않는 안타까움!

13.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끔찍한 소식을 전하란다. 단에서 선포하고, 에브라임 산에서 공포하고, 예루살렘에 알게 하란다! 이 세 지명의 위치가 어떤 관계인지 확인해보자.

    단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단이고, 에브라임은 예루살렘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마치 먼 곳에서 적군이 순식간에 쳐들어오는 과정과 비슷하다. 16절의 표현을 참고한다면 ‘먼 땅에서 유다로’라는 것과 비슷하지만 공포감은 더 크다.

14. 먼 땅에서 유다까지 와서 소리는 왜 지르나?

    항복해라,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준다. 이런 소리지 머!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소리 소리 지른 장면을 생각하면 되겠다(사 36장)

15. 농부가 밭에 있는 자신이 수확한 농작물을 지키는 눈빛이 어떠할까? 대적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모습이 그와 같단다. 공통점이 무엇이길래 이런 표현을 썼을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16. ‘슬프고 아프다’의 난외주는 ‘내 창자여 내 창자여’이다. 그렇게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들 식으로 표현하면 ‘아이고, 배야’이다. 선지자가 극심한 고통에 떠는 이유가 무엇인가?

    온 땅이 탈취를 당하는 장면을 세세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 재앙을 멈출 방도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22). 선지자는 끔찍한 징계를 미리 내다보면서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백성들이 당할 아픔을 미리 느끼면서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는 아픔 말이다. 선지자, 지도자의 모습이 이런 것 아닐까?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도 전혀 아파하지 않는 선지자도 있는 모양이다.

17. 슬프고 아프고 답답한 선지자가 ‘언제까지 이런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답변을 간단히 말하면?

    내가 더 답답하다(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 지각이 없는 자, 악에는 지혜롭고 선에는 무지하다(22절).

18. 하나님께서 심판받은 후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바라보니 무엇과 비슷한가?

    창조 이전의 모습(23-25):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모조리 헛일이 되어버린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셨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작업한 것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을 때의 허탈함, 어떤 학자가 평생 동안 연구한 자료를 하녀가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던가?

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한 이 땅은 그렇지 않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헤매던 자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 걸까? 그러면 두 정탐꾼이 포도송이 하나를 메고 온 것은? 23-28절에서 혹시 무슨 단서가 있을까?

    우리가 보는 땅은 황폐해진 이후의 것일 수도 있다(26절).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버림을 당하고 난 이후의 땅이다. 고대에 그 땅이 지금과 어떻게 달랐는지는 모른다(고대 기상학을 연구하는 분들 중에는 분명히 달랐다고 하는 분들이 있단다). 성경은 그 땅이 정말로 좋은 땅(겔 20:6),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며 동시에 황폐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20.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말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으로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구스인의 피부 색깔을 바꾸는 것’, ‘표범의 반점이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렘 13:23). 본문에도 비슷한 것이 하나 있는데?

    산이 진동하거나 요동하는 것(24):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늘이 무너져도 변함없이 서 있을 존재로 여겨졌다. 예수님께서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해도 될 것이요’(마 21:21)라는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인 발언이었을까? 큰 산이 진동하고 작은 산이 요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21. 선지자들의 메시지에서 심판이나 하나님의 진노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메시지는 아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땅이 황폐할 것이나 진멸하지는 않을 것이며: 노아의 때, 소돔 고모라의 때, 엘리야의 시대, 이사야의 때, 징계 때마다 그랬다. 하나님의 목표는 멸하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후손을 보내서 자기 백성을 결국은 구원하는 것이다. 어떤 선지자의 메시지에도 이것은 빠지지 않는다.

22.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어느 정도로 확고한가?

    말하였고,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돌이키지 않으리라(28).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 4:12)고 했는데 이것은 사겹 줄이다.

23. 한 때는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찾아서 죽이려고 하는데 그 연인을 생각하면서 붉은 옷을 입고 단장하고 눈을 그리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것이 무엇을 비유하는 걸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외국의 도움을 바라는 것: 이렇게 단장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창녀의 행위를 뜻한다. 그렇다면 연인은 창녀를 찾는 손님일 뿐이다. 그 손님이 ‘너를 멸시하고 네 생명을 찾는 일’은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바벨론의 침입을 당한 유다가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임을 뜻한다.

24. 해산의 고통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축복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복의 의미는 빼고 고통소리와 고통스런 모습만 빌려왔다. 새 생명의 탄생은 없고 고통만 엄습하는 이 모습은 무엇의 상징인가?

    남편(하나님)을 거부하고 음란한 자들(우상, 이웃 나라)과 놀아났던 이스라엘의 허무한 결말: 초산은 고통이나 두려움이 더 크다. 이스라엘이 당할 고통이 그만큼 크기도 하겠지만 처음 겪는 아픔이기도 하다.

25. 위에서 언급한 유다가 겪게 될 엄청난 비극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마음 가죽을 베라, 묵을 땅을 갈아엎으라(1-3): 사자의 밥이 되는 것,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마치 창조 이전처럼 황무해지는 것, 창녀가 손님에게 맞아 죽는 것, 낳을 아이도 없는데 해산의 고통만 당하는 것, 이런 것들이 돌이키지 않을 때 유다가 당할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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