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장


1. 특정한 단어가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장에서 거듭거듭 사용되는 특징적인 단어는 무엇이며 몇 번이나 사용되었는가?

    ‘돌아오다’는 표현이 7번 (1, 7(2번), 10, 12, 14, 22): 본 장이 집을 나가버린 아내와 같은 유다를 향해서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간절히 촉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2. 부인이 남편에게 버림받고 떠나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후에도 남편이 부인을 다시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면 땅이 크게 더러워지니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법에도 그럴 수 없다(신 24:1-4).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뒤집어 가면서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다. 사람은 그럴 수 없어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집을 나가 행음한 아내와 같은 유다를 다시 맞아들이겠다는 것이다(호 4장).

3. 2:1-3절과 3:1-5절을 참고로 하여 유다의 변화를 한 소녀의 성장으로 설명해보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나서 우정이 애정으로 변하고 마침내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랬는데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래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남편의 마음은 어떠할까? 잘 모르겠다.

4.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잘못인가?

    창녀라는 뜻이다

5.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이들의 생업이 무엇이었을까?

    약탈: 숨어서 약탈의 대상을 기다리듯, 이스라엘이 음행할 대상을 노렸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영화)에서 이런 장면들이 더러 보인다.

6.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의 모습을 집 나간 아내에 비유하고 있다(1절). 우상에 대한 열심을 또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가(2-3절에서 2가지)?

    약탈자(행악)와 창녀(음란): 우상을 숭배하면서 선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상은 사람을 결코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 음란을 즐기는 사람이 악을 행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7. 이스라엘의 행음과 단비와 늦은 비가 그친 것이 무슨 상관인가?

    늦은 비와 이른 비가 시후(時候:사시와 절후(절기))에 맞게 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레 26:4).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얼마든지 징계하실 수 있다.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예전에 보지 못하던 재해가 닥치는 것도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8. 창녀의 낯이 어떠하길래?

    부끄러움을 모른다.

9. 유다가 특별히 악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 가지 지적한다면(3-5절에서)?

    징계를 받아도 창녀처럼 수치를 모르는 것과 하나님께서 노를 한없이 계속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껏 악한 짓을 했다는 점이다. ‘소시의 애호자’는 ‘어릴 적 친구’라는 의미이다(참고 2:2). 설마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무시하였을까? 이것도 비유라고 본다면 북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전이 있는 것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으로 착각한 탓일 것이다. 하나님의 전이 있고 거기에서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일이 있겠느냐는 착각 말이다.

10. 요시야 왕 때라면 예레미야 사역의 초기인데?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유다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인데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4-5절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섬겼다. 스스로 생각하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11. 이스라엘은 왜 높은 산과 푸른 나무 아래서(6) 행음하나? 유다는 어떻게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하나(9)?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을 섬긴 것을 행음에 비유한 것이다. 그렇게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 속에 실제로 음행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짓을 하기에는 푸른 나무 아래가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요즈음 말로는 ‘러브 호텔’인 셈이다. 이스라엘이 그런 짓을 하다가 망하는 것을 보고도 유다가 같은 짓을 하다니!

12. 유다가 본 것(7절)은 무엇이며 보고 한 짓은 무엇인가?

    유다가 본 것: 이스라엘이 높은 산과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하는 것(6), 그러다가 멸망당한 것.
    유다가 보고 한 짓: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하는 것(9). 이스라엘이 그런 짓을 하다가 망하는 것을 보고도 유다가 같은 짓을 하다니!

13. 간음을 행한 이스라엘에게 이혼서를 주었다는 것(8)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버려두었다는 뜻이다(왕하 17장). 이혼서를 써주었다는 말은 완전히 갈라섰다는 말이다. 유다는 그것을 보면서도 같은 짓을 하다니...!

14.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망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유다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까? 설마 그렇게까지 어리석을까? 유다가 반성하고 돌이켰다는 증거를 10절에서 찾아보라.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돌아오긴 돌아왔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보고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거짓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회개하는 시늉만 낸 셈이다.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도 섬기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형식적인 선에서 머물렀던 모양이다. 종교 행사는 많으나 진심이 빠져버린 열심!

15. 12절의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은 5절의 ‘노를 한 없이 계속하시겠으며...?’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

    전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뜻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니 걱정할 필요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악한 짓이다. 야단을 쳐봐야 얼마나 치시겠냐?

16.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우상만 섬기다가 130여년 전에 망해버렸음에도 배역(은혜를 저버리고 배반함)한 이스라엘이라 하고, 망하지 않고 남겨두셨다는 자기 백성 유다를 향해서는 패역(도리에 어긋나고 불순함)한 유다라고 하신다(7-8, 10-11). 왜 이스라엘이 더 의롭다고 하시는가(11)?

    그렇게 징계 받는 모습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는 유다는 더 죄가 많다는 뜻이다. 징계를 받아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17. 망하고 없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고(12-13절)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유다의 죄악이 너무 심하니까 이스라엘을 심판한 것을 후회하는 걸까?

    유다보고 들으라는 말이다. 산 자식을 옆에 두고 죽은 자식을 향해서 하는 말은 산 자식더러 듣고 반성하라는 말이다. 곧 이어 유다를 향해서 하는 말(14-18)과 다르지 않다. 쫓아낼 때는 쫓아내더라도 분을 오래 품고 있지 않다. 유다를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을 이스라엘에게 하는 양하고 있는 것이다.

18. 아무리 하나님이시지만 어떻게 배역한 자식에게 남편이 될 수 있나? 촌수가 엉망인데? 자식이라 했다가 아내라 했다가?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다. 징계를 받아 마땅한 짓을 하는 모습은 배역한 자식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런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남편이 아내에게 쏟는 사랑과 같다는 뜻이다. 아니면 ‘자식’이 단순하게 ‘사람’을 뜻하는 의미인가?

19. ‘나는 너와 결혼하였다’라는 책이 있었는데 제목을 예레미야서에서 따왔단다. (한글 개역 성경의) 예레미야서에 아무리 찾아도 그런 말이 없다. 알고 보니 다른 번역본에 그런 말이 있다. 본 장의 어느 구절일까?

    3:14,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남편의 원어는 ‘바알’(=본 뜻은 ‘주’)이다. 나는 너희의 ‘바알’이니라는 말씀은 그들이 섬기던 우상 ‘바알’을 염두에 둔 언어유희이다.

20. 죄를 자복하라, 돌아오라(13)고 부르시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셨다(14-18절).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말씀하신다. 달라진 그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보내서 제대로 양육하겠다: 그러면 백성이 다시 번성할 것이고 언약궤도 없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사 52:1-2)을 참고하면 새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이다. 메시야 왕국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21. 다시 번성할 때는 왜 언약궤에 대해서 말하지도 생각지도 찾지도 않을까?

    언약궤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메시야 왕국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다. 예배도 언약궤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드린다.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셈이다.

22.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다니? 언제 갈라졌다가 언제 다시 합친다는 말인가?

    갈라지기는 솔로몬 사후에 갈라졌다(BC 930). 요시야 때를(즉위 BC 640) 기준하면 약 300년 전이다. 역사적으로 언제 다시 합쳐졌는가? 북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족만 남기고 사라졌다. 포로로 잡혀간 일부가 포로 귀환 때 함께 돌아왔을 수는 있지만 그것보다는 훗날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사라지고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베풀어주셨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는 아내가 남편을 속이듯이 떠나갔다. 그런 짓을 한 이스라엘의 결과는?

    자산(민둥산) 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 뿐(21):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누구에게 애곡하며 간구하겠는가? 우상을 섬기는 자의 말로는 이럴 수밖에 없다.

24. ‘배역한 자식들아 회개하고 돌아오라’ 이래야 정상일텐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22)?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고치리라: 스스로 고칠 능력이 없으니...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할 때만 해도 가능성이 있는 상태일텐데 ‘돌아오면 고쳐주리라’는 것은 스스로 돌이킬 능력조차 잃어버린, 해도 해도 너무한 상태이다.

    [ 22절 하반절부터는 4장에 붙이는 것이 옳겠다 ]
    자산(赭山): 민둥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교적인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쓰였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을 상징하는 산은 삼림이 울창한 산이다(사 41:18, 49:9).
    아라바: 지금의 아라비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요단강을 따라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저지대를 총칭하는 이름이다(수 11:2). 그래서 여기에 있는 사해를 아라바 바다라고 부른다(신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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