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9-41장


[39장]

1. 바벨론에 포위된 채로 얼마나 버텼는가?

    1년 반 동안: 그러니까 이 기간동안 예레미야가 옥에 갇히기도 하고 시위대에 갇혀있었다. 유다의 시월을 양력으로 하면 1월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BC 588년 1월에 포위되어서 BC 586년 7월에 함락되었다.

2. 포위되어 있어도 도망갈 길(두 담 샛문)은 있었던 모양이다. 몰래 군사들을 거느린 채 빠져나갔으니 말이다. 아라바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표현이 있는가?

    여리고 근처인 모양이다: 아라바는 갈릴리 호수에서 요단 계곡을 따라 사해를 지나 아카바만에 이는 저지대를 가리킨다. 꽤 넓은 지역을 가리키지만 시드기야는 아마도 여리고쪽으로 도망을 갔던 모양이다.

3. 예레미야가 그만큼 항복하라고 권해도 끝끝내 말을 듣지 않더니 시드기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식들의 처형을 목도하고 자신도 눈이 뽑히고 말았다. 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다윗의 족보에 들지도 못했다.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

4. 유다의 멸망을 오히려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을까?

    포도원과 밭을 얻은 사람들 아닐까?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보다 민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기뻐할 수 없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나라가 망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도록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미래가 없다.

5.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어떻게 먼 외국으로 포로로 잡혀 가나(9)?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힘이 없으면 잡혀가야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공부를 안 해도 성적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만 잘 믿으면 아무렇게나 가게만 차리면 손님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잘못이다. 제대로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유다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무시하고 끝내 하나님을 져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 회복시키실지라도 징계할 때는 징계하시는 분이시다.

6.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게 왜 호의를 베푸는가?

    포위되어 있는 동안 적의 동태를 아는 것은 전쟁의 기본이다. 어떤 경로를 통했건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해야 된다고 말한 것을 아는 탓이다.

7. 에벳멜렉은 왜 이런 호의를 입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18).

8. 에벳멜렉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있었던 얘기다. 그러면 38장 어딘가에 기록하는 것이 옳을텐데 왜 여기다 기록했을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 같다. 시드기야의 비극과 대조적으로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이 구원받는 장면이 상세하게 기록된 것이 그런 이유인 것 같다.

[40장]

9.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따라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집으로 돌아가게 했는데(39:11-14), 여기서는 예레미야가 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가다가 라마에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말이 서로 다르지?

    39장의 얘기는 중간의 세세한 과정을 생략한 표현이고, 여기서는 자세하게 기록한 탓이다. 큰 줄거리(5-6)만 맞춰보면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혹은 다른 얘기 일 수도 있다. 석방시켰는데 병사들이 실수로 또 잡아들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10. 1절에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없다: 시위대장이 예레미야에게 말한 것과 행한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가? 소위 ‘행위 계시’인가? 여전히 유다에 남아서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 아닐까?

11. 바벨론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셈이다.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런데 바벨론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비극이다. 어떻게 들어야할 자기 백성은 듣지 않고, 들을 필요도 없는 적군은 자세히 듣고 즐거워할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를 때 귀신들이 알아보고 큰 소리치는 것하고 비슷한가?

12.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과 남은 동족들과 함께 백성 중에 거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좋을까?

    남아 있는 것이 좋을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인다. 더 고생일 것 같다. 차라리 잘 대우해주는(4절의 ‘선대’는 귀인으로 대접하다는 뜻) 바벨론이 낫지 않을까? 바벨론의 선대를 거부함으로서 예레미야가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 셈이다.

13. 웬 군대장관이 들에 있지?

    바벨론의 군대를 피해서 한적한 곳으로 도망간 군대장관들이다. 말하자면 유격대장? 몽고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삼별초 같은 군대다. 이들의 이름을 자세하게 언급하는 것은 나중에 사고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다랴를 암살해서 결과적으로 유다의 씨를 말려버린 자(이스마엘)가 있기 때문이다.

14. 그다랴가 임시 수도로 삼은 곳이 어디인가?

    미스바(6, 8, 10): 예루살렘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다.

15. 포도주와 여름 실과는 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16.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염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간신히 유다 민족이 명맥을 이어가는 것마저 끊어지는 것(15c)

17. 그다랴는 왜 요하난의 말을 믿지 않았을까?

    알 수 없다: 이제 겨우 흩어진 사람들을 모아서 수습을 하는 마당에 사람을 믿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때에 피를 흘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착한 사람이 이런 방면에는 무능(?)하다.

[41장]

18. 이스마엘이 왜 그다랴를 죽였을까?

    바벨론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암몬 왕의 사주를 받았다(40:14)는 점과 거사 후에 암몬으로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유다와 함께 바벨론에 대항했던 암몬으로서는 바벨론의 꼭두각시 정권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다. 그다랴는 귀족 출신이지 왕족 출신이 아니라는 점도 원인이 되기는 했을 것이다.

19. 여호와의 집으로 가려는 80명은 왜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을 상했을까?

    성전 파괴에 대한 애통함의 표시일 것: 이들이 출발지가 북 이스라엘의 경내이다.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도 일부는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킨 모양이다. 유다가 망하고 성전이 불탄 이후에도 그 장소에 모여서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일을 계속했던 모양이다.

20. 이스라엘이 왜 울며 행하였을까?

    여호와의 집으로 가려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라고 속이려고.

21. 아사왕이 바아사를 두려워 했는데 왜 구덩이를 팠지?

    원래 구덩이는 물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아사왕이 판 구덩이는 아마도 미스바를 요새화 하기 위해서 팠을 것이다(왕상 15:22).

22. 이스마엘이 한 짓은 최소한 하나님을 생각하고 행한 행동은 아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유다를 완전히 황폐화 시켜버렸다. 희망의 싹마저 잘라버렸다: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자들은, 이스마엘의 손에 죽고, 그래도 남은 자들은 애굽으로 가고. 유다 땅에는 누가 살지?

23. 요하난은 의로운 사람인가?

    인간적으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으나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24. 이스마엘이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다는 제보를 받고도 그다랴가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것은 실수인가? 판단 착오인가?

    사람이 그냥 좋기만 하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다. 지혜롭지 못한 믿음도 때로는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주의!

25.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암살하고 요하난에게 패하고, 요하난은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 이런 내용이 굳이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결과 일정한 기간 동안 황무지처럼 버려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레 26:34-35, 43, 사 6:11-12, 대하 36:21).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다. 유다의 멸망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인간을 의지하는 자들은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이사야가 말한 남은 자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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