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7-38장


예레미야 37장

1. 36장은 여호야김 4년, 5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나갔음을 의미한다. 대략 몇 년 뒤의 일일까?

    약 6년 후: 여호야김의 재위기간은 11년이고, 그 아들 고니야(여호야긴)는 3개월이다.

2. 왜 바벨론 왕이 유다의 왕을 결정하는가?

    바벨론이 침략해서 유다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2차 침입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2).

3. 시드기야가 왕이 된 것은 2차 침입 때의 일이다. 그런데 또 바벨론 군대가 성을 에워싸고 있다면 3차 침입을 말하는가? 11년의 간격이 있는데? 21장과 관련이 있으므로 선후관계를 생각해보자.

    같은 시기의 일이지만 본문이 먼저다. 21장에는 예레미야가 갇혀 있었으나 여기서는 갇히기 전의 일이다. 스바냐는 후일 포로로 잡혀 가서 편지를 보낸다(29:24-32).

4.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바벨론 군대가 철수하는 때에 왕이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바벨론에 대항하는 자신의 소신이 성공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셈이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5. 왕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더니 대답은?

    바로의 군대는 돌아가고 바벨론 군대는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멸할 것이다(7-9): 선지자에게 기도해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셔야 하는 것 아닌가? 심판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때가 되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6. 적군과 싸워서 아군을 멀쩡하고 적군은 부상자만 남았다. 다 이긴 것 아냐? 그래도 못 이긴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유다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는 과장법이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유다는 반드시 망한다는 말이다.

7.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난 일을 뭣하러 두 번이나(5, 11) 기록하였을까?

    5절은 이렇게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희망이 아니란 뜻이고, 11절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갈 수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8. 예레미야는 선지자이었지만 대접은 받지 못했다. 문지기마저 우습게 여기고 그를 끌고 갔으며 그 말을 들은 방백들은 가두어버렸다. 예레미야가 왜 이렇게 푸대접을 받는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사람의 귀에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9. 시드기야는 유다 최후의 왕이다. 바벨론 왕에 의해서 세워졌으니 그리 힘이 있는 왕도 아니었다. 끝내는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망하고 말았는데 그가 이렇게 악한 왕이 된 원인을 본문에서 찾는다면?

    신하들의 눈치를 보느라고(17절의 비밀히)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친애굽파의 말을 듣다가 대의를 그르치고 말았다.

10. 선지자는 언제나 당당해야하지 않을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간청을 해야 하나(20)?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굳이 죽자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담대해졌을 뿐이다. 이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도망치지 아니하고 민족과 함께 고난받은 위대한 선지자이다.

11. ‘바벨론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19)라고 묻는 의도는 무엇인가?

    죽이려면 그들을 죽여야 한다: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 밝혀졌으므로 율법에 따라 거짓 선지자는 죽여야 한다(신 13:1-5)는 말이다.

예레미야 38장

1. 적군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대 뜰에 갇힌 선지자는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 어떤 상황이든 간에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해야 한다(2, 21:9). 친애굽파들이 정권을 잡고 바벨론과 대항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유다에 대한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데 버티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는 반역죄인으로 몰릴 수 밖에 없다.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자고 주장하는 것과 항복하자고 말하는 것 중에는 어느 것이 쉬울까?

2. 방백들이 보기에는 예레미야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4). 무조건하고 민족의 평안을 비는 것만이 백성을 위하는 일인가?

    일반적인 기도는 그렇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기도는 반드시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만 그렇다. 바벨론의 침입이 하나님의 징계인데 싸워서 이기게 해달라거나 적군이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3. 방백들의 요구에 대해서 왕의 대답(5)은 너무나 허약하다. 시드기야 왕이 왜 이 모양인가?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가고 난 뒤에 바벨론 왕이 세운 왕이다. 정통성도 없을 터이고,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4. 옥이 이상하다. 줄로 달아서 내렸다가 줄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아서 사람이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물이 없는 진흙구덩이였다는 것은 어떨 때는 물이 있는 곳이라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원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 예루살렘은 산 꼭대기에 세운 성읍이다. 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겨울비가 내릴 때 받아서 저장하는 시설이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속은 넓지만 물을 길어올릴 구멍은 좁았다. 물은 없어도 바닥은 진흙, 즉 뻘 같았을 것이다.

5. 왕이 왜 문에 앉았나?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재판을 위시한 업무를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6. 왕이 이렇게 지조가 없나? 에벳멜렉의 말은 왜 이렇게 잘 들을까?

    방백들의 요구에는 억지로 동의했지만 후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에벳멜렉의 말을 듣고 용기를 냈을 것이다. 군사를 30명이나 데리고 가라는 것은 어쩌면 방백들과 한 판 승부를 염두에 둔 것 아닐까? 갑자기 이렇게 단호해지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사람이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데...

7. ‘털끝만큼(=一毫)도 속이지 말라’고 하는 왕의 말은 별로 권위가 없다. 예레미야가 뭐라고 하는 셈인가?

    듣지도 않으면서(15): 원래 별 힘도 없는 사람이 말은 세게 하는 법이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방백들을, 또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한 유다인들(19)을 더 무서워한 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나약한 왕이 된 원인이다.

8.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는 분명한데 왜 또 묻는가(14, 16)? 말씀대로 실천한 용기도 없으면서?

    혹시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이전의 메시지는 방백들 때문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좀 바꾸시지 않을까? 에라, 이...

9. 시드기야의 맹세(16)는 믿을 수 없다. 왜?

    하나님보다 방백을 더 두려워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밀스럽게 하는 맹세를 어떻게 믿나? 차라리 방백들의 이름으로 한다면 더 신빙성이 있을까? 오래 살 능력도 없으면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거나 비슷하다. 그래도 말은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 불쌍한 인생이다! 예레미야가 그 맹세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10. 결국 시드기야는 왕궁의 여자들(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궁녀들)에게서조차 조롱을 받을 것이다. 이 여자들이 무엇이라고 조롱할까?

    친구들에게 속아서 진흙 구덩이에 빠진 머저리(22): 일종의 배신이기도 하다.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진흙 구덩이에 빠지자 친구들이 다 도망가버렸다. 아마도 멍청한 사람을 조롱하는 관용적인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11. 예레미야에게 왕과 주고 받은 말을 방백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의도는 무엇인가?

    예레미야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방백들이 두려운 탓이다.

12. 나약한 왕의 말을 듣고 비밀을 지키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왕: 왕이 뭐라고 하든 사실대로 말해야 되는 것 아닌가? 바벨론에 항복하든 끝까지 버티든 그것은 왕의 일이다. 예레미야가 나서서 결정해야 할 일이 아니란 점에서 왕의 말을 들어줄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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