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6장


1. 여호야김 사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의 요지가 무엇이며 여호야김이 왜 극도로 듣기 싫어했는지 여호야김 4년과 관련지어 보자.

    바벨론이 애굽 군대를 격파하고 시리아, 팔레스틴을 공략하던 해이며 1차로 유다를 침공한 해이다(BC 605). 여호야김은 애굽 왕이 세운 친 애굽파 왕이다. 예레미야의 메시지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징계할 것이라는 내용이 주류이었을 것이다.

2.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을 다른 말로 하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날부터(네가 사역을 시작하던 날부터):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1:2).

3.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는 이유가 있을까?

    일단은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5): 바룩이 대신 전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록되어야 한다. 바벨론이 침공이 눈 앞에 닥친 상황에서 후대에 까지 전해지도록 하려면 기록해야 한다. 말로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오늘날까지 성경이 전해진 결과를 생각해보라. 모세가 백성들을 40년 이끈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오경을 기록한 것이며 바울이 행한 가장 큰 사역은 성경을 기록한 것이다. 초대교회들이 다 사라져도 그가 기록한 글이 남아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지 않은가!

4. 유다 족속이 악한 길에서 돌이킬 듯하다고(3)? 하나님도 속는 거야?

    회개하기를 인내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 백성들은 그럴 것 같은데(7) 왕이 요지부동이다. 그래서 지도자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 특히 목사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

5. 바룩이 기록한 책의 저자는 누구인가(4)?

    하나님은 저자(2, 4 이르신), 예레미야는 전달자(구전대로), 바룩은 대필자(기록하니라): 성경은 비록 사람의 입을 빌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더라도 하나님의 간섭(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진 것이 때문에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믿고 들어가보면 그것이 확실하다는 체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6. 예레미야가 감금을 당하였는데(6) 어떻게 숨을 수 있는가(19, 26)? ‘감금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제지, 혹은 억제하다’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 감금이란 말은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6): 일종의 연금 상태이거나 성전 출입금지를 당했거나.

7.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으므로 바룩을 시켜서 비밀리에 백성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면 어느 때에, 어디가 가장 좋을까?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서: 금식일이 어떤 금식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가장 많은 백성들이 한 곳에 모이는 날이고 들으려는 자세가 된 날과 장소이다. 어쩌면 바벨론의 침공이 임박한 상태에서 특별 금식을 선포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다른 서기관들과 방백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가장 유리한 날과 장소임에 틀림없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때와 장소를 잘 선택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는데(딤후 4:2) 다른 말인가? 핵심이 다를 뿐 같은 말이다. 바울의 말은 ‘노력하라’는 뜻이다.

8.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와 분이 크다(7). 회개할 듯 하니까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했는데 이 때는 외적의 침입이 임박한 시점이다. 백성들, 사관, 방백, 왕의 태도를 비교해보자.

    백성들의 반응은 나타나있지 않다. 앞장의 레갑족속과 대조적이다. 사관이나 방백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왕이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선지자의 말보다 왕이 말이 더 세다. 결국은 회개하지 않은 셈이다. 왕의 회개가 이래서 중요하다. 사관이나 방백들이 예레미야와 바룩의 생명을 염려하여 숨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긍한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받아들이면서 행동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입으로는 시인하면서도 행동으로 시인하지 않는 성도와 같다. 8절과 10절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같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인지, 아니면 바룩이 여러번 낭독했는지.

9. 바룩이 어디서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하여 모든 백성에게 들리게 했는가?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방에서 책을 낭독하는데 어떻게 모든 백성이 들을 수 있는가? 그 방이 여호와의 집 윗 뜰과 바로 이어져 있어서 뜰에(여호와의 집 새 문 어귀에, 26:10) 모여있는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낭독할 수 있는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사반은 요시야 시대에 힐기야가 성전에서 두루마리를 발견하여 왕에게 읽어주었던 서기관이다(왕하 22:10).

10. 서기관의 방이 왕궁에도 있고, 성전에도 있네. 어느 방이 더 컸을까?

    아마 왕궁의 방(서기관 엘리사마의 방: 아마도 수석 서기관인가 보다, 20): 성전 서기관의 방 주변에는 백성만 있었고, 왕궁 서기관의 방에는 모든 서기관과 방백들이 있었다. 왕궁의 방이 급수가 높네! 서기관의 역할이 종교적인 것도 있고 행정적인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행정적인 측면이 더 강했던 모양이다. 왕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사관)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나 보다. 서기관인 그마랴는 왕궁 서기관의 방에 있고, 아들인 미가야가 성전 서기관의 방을 지키고 있었다. 미가야는 서기 보조였을까?

11. 하나님의 말씀이 왕에게까지 전해지는 과정을 정리해보자.

    예레미야의 구술 → 바룩의 기록 → 성전에서 낭독(바룩) → 미가야의 전달 → 여후디 파견 → 왕궁 서기관의 방에서 낭독(바룩) → 왕 앞에서 낭독(여후디): 이 과정에 관계된 모두가 우호적이었다. 유일하게 왕만 악한 셈이다.

12. 방백들의 질문이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기록하다니? 볼펜으로 썼을까? 당연히 먹으로 기록하지?

    바룩의 대답 중에 ‘그가 그 입으로 이 모든 말을 내게 베풀기로’가 중요하다. 방백들의 질문의 요지는 ‘이것이 정말 예레미야의 입을 빌린 하나님의 말씀이냐?’라는 것이다.

13. 구월인데 왜 그렇게 추울까?

    우리 양력과는 3달 정도 차이가 있다: 11월이나 12월 정도 되었을 것이다.

14. 여호야김 왕은 여러모로 부친 요시야(왕하 22:11-20)와 대비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취한 두 왕의 태도를 비교해보자.

    요시야: 곧 옷을 찢고(왕하 22:1),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다(왕하 22:19): 재앙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
    여호야김: 읽는 족족 칼로 베어 태워버렸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다. 신하들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왜 이럴까? 어떻게 이렇게 악해질 수 있는 걸까? 왕이라고?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자가 아닌데, 어디서 이런 못된 짓만 배웠을까? 아버지는 드물게 선한 왕이었지만 자식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나? 아이구 머리야!

15. 유다 왕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사른 이유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어느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인가(29)?

    바벨론 왕이 정녕히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29): 여호야김은 애굽의 바로느고가 왕으로 세웠다. 바로에게 많은 공물을 바치고 있었다(왕하 23장). 그러면서도 애굽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뿐더러 정치적으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16. 여호야김의 후손은 어떻게 되나?

    여호야긴이 왕위를 물려받지만 석달만에 포로로 잡혀간다. 결국은 다윗의 위가 끊어진다(=유다의 멸망). 그러나 영적으로는 다윗의 위가 여호야긴을 통해서 예수께로 이어져 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여호야김에 대한 긍휼이 아니라 택하신 자기 백성에 대한 긍휼이요,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려는 것이다.

17. 화로가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장, 한 장 불에 태우던 여호야김의 말로는 어떤 모습인가?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30): 하나님 없이 큰 소리치는 모습과 그 처참한 결과가 잘 대비된다. 그러나 여호야김의 마지막을 언급한 세 구절(대하 36:6-12, 왕하 24:6, 렘 22:19)이 제각각이어서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22장의 11번의 참고하세요.

18. 교회 역사상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적잖게 있었다. 기록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보존하는 것도 하나님과 상관이 있을까?

    28절: 당연히 보존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렸을 때도 다시 기록하여 주셨던 분이시다.

19. 예레미야서는 역사적인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처음에 기록했던 것은 여호야김 왕이 태워버렸고, 두 번 째 다시 기록하면서 이런 저런 내용을 더 추가하다보니? 설마? 아마도 주제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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