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1장


1. 앞 장에 이어 회복의 메시지가 이 장에서도 계속된다. 수없이 징계를 말하고, 전쟁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다(애 3:33). 결국은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다(1). 그렇다면 야단치지 않고 그냥 백성 삼으면 안되나? 말씀으로 변화시켜 버리시든지...

    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랑 때문이다: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를 위해 주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스스로 동의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신다. 사람들끼리 하는 말로 하면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2.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1)은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표현이다. 성경이 정말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증거가 또 있는가?

    무수히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사역 속에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줌으로서 최초의 가정을 이룬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계명이다. 부모를 가벼이 여기는 죄는 정말 중범죄이다(출 21:15, 17).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는 말씀을 함부로 가정을 버리거나 가족관계를 깨는 근거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3.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2)? 은혜를 베풀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야지?

    출애굽을 말한다: 애굽이란 칼에서 벗어나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이런 은혜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한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이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b). 결국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또 다른 광야일 뿐이다. 새로운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4. 3절의 ‘옛적에’란 말은 시간이나 거리상으로 멀다는 뜻이다. 그래서 ‘멀리서’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

    멀리서 찾아온, 무궁한 사랑으로, 인자함(헤세드: 주로 언약과 연관된 단어이다)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래 먼 사이다. 그 먼 사이를 극복하고 언약을 맺고 끝까지 언약을 지키는 무궁한 사랑이다.

5. 4-5절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무엇인가?

    다시: 출애굽이 다시 반복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출애굽이라는 말이다. 숨어서 반복되는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 사마리아, 에브라임(6)’이다. 실상은 같은 말로 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부분(1-22)은 특히 북쪽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라고 하기도 한다.

6. 포도원을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스라엘의 훗날 역사를 보면 심는 자가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집을 지었으나 타인이 거하고, 정혼하였으나 다른 남자가 동침하고...’(신 28:30-31)라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사 62:8-9).

7. 에브라임 산 위에서 외치는 파수꾼의 외침이 어떤 점에서 이상한가?

    적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파수꾼인가? 마치 ‘예배 시간이 다 되었다’고 외치는 듯 하다.

    이스라엘이 분리된 후에 북 이스라엘은 벧엘과 단에서 여로보암이 만든 신전에 모였다. 그런데 시온(유다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외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로 완전히 회복된 것을 말한다.

8. 야곱이 어떤 사람이기에 그를 위하여 기뻐 노래하라는가?

    만국의 머리: 야곱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가리킨다.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불쌍한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 돌이키시면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만국의 머리가 된다. 영적으로 이 민족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속적으로만 보아도 오늘 우리는 유대인이 정말 대단한 민족이라는 것에 별로 놀라지도 않지만 당시에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만국의 머리는커녕, 가장 비참한 민족으로 온갖 비난과 조소를 받아야 했다. 후일에도 오랫동안 그랬다. 정말 오랫동안 그랬다.

9.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어떻게 소경과 절뚝발이와 같이 취급되는가?

    특별히 조심스럽게 돌보아야 하는 점에서(9): 이들에게 장거리 여행이 무리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숫가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강을 따라 난 길이 가장 평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때에는 이렇게 연약한 자들까지도 특별한 은혜를 베풀며 세심하게 돌보실 것이다.

10. 촌수가 이상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비라면 에브라임은 손자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이스라엘과 에브라임 둘 다 동일하게 이스라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부자지간이지만 여기 내용상으로는 둘 다 동일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표현이 구약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이스라엘은 그만큼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걸음도 잘 걷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돌아오듯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걸음도 잘 걷지 못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돌보면서 돌아올 때 아들의 표정이 어떨까? 울지(9)!

    범죄함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을 부둥켜 안고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애처롭다. 누군가가 ‘가능성이 없으니 그만 포기하시지요?’ 한다면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애비 아니냐?’라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목자가 그 양무리를 지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10). 9절의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라는 표현은 야곱의 유언을 연상시킨다.

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소식이다. 이렇게 기쁘고 놀라운 소식은 어디까지 전해야 하는가?

    먼 섬까지: 땅 끝까지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구원의 소식은 땅끝까지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먼 섬은 땅 끝에서 떨어진 곳이다. 열방은 모든 사람으로 이해해도 좋다. 물론 전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한다(10). 듣지도 않고 달려가는 사람들도 가끔은 있더라.

12.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나 포로에서 놓여나 고토로 돌아오는 것이 역사의 흐름을 따른 자연스러운(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나님께서 흩으시고 모으시는 일이다(10): 하나님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우연이나 필연이나 내용상 다 같은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도 같은 의미이다. 외형상 그렇게 보여도 역사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다.

13. 이스라엘의 구원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되는 것이다. 그런 말은 본문에 없는데...?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11):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그저 놓아주는 법은 없다. 더구나 국가 간에는 더 더욱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속량’이라고 번역된 말은 ‘고엘’이다. 가까운 친척이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 룻기에서 많이 등장하는 ‘무르다’는 말이다.

14.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신 결과 이스라엘의 근심과 슬픔이 무엇으로 변하는가(12-14)?

    영육간의 즐거움: 기쁨을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찬송, 양식이 풍부함, 심령의 즐거움(물댄 동산, 사 58:11), 육체의 즐거움(춤), 기쁨, 흡족, 만족.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육적인 복도 포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는 잘 먹고, 즐거워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가난에 찌들려 궁색하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복받은 증거는 즐겁게 사는 것이다.

15. 제사장의 심령을 흡족케 하는 데에는 왜 기름이 필요한가(14)?

    기름이 가리키는 것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받는 자신의 몫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사장의 몫이 많다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많이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제사장에게는 가장 큰 기쁨을 준다. 일의 보람도 있고, 양식이 풍성한 즐거움도 있다. 제사장이 몫이 풍성해진다는 것은 모든 백성이 풍성하다는 뜻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온전히 회복됨을 의미한다. 교인들이 가난한데 목사만 부유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6. 라헬의 통곡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구절은 헤롯의 유아학살 사건 때 인용되는데(마 2:16-18)? (참고, 삼상 10:2-3, 창 35:16-20)

    1차적으로는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은 슬픔을, 2차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이 망하는 슬픔, 3차적으로는 헤롯에 의해 자녀가 죽임을 당한 슬픔: 베들레헴 길 에브랏(창), 베냐민 지경 셀사(삼상), 라마(렘)는 대략적으로 본 동일한 지명이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땅이라는 것은 북이스라엘의 영토라는 말이다. 창세기의 사건을 예레미야는 비유적으로 끌어왔고 이 구절을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17. 라헬이 통곡하듯이 이스라엘도 통곡할 날이 이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다를까?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고 해도 이스라엘은 위로를 받을 것! 통곡 소리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울지말라는 것이 핵심이다.

18. 18-19절과 20절에 각각 제목을 붙인다면?

    18-19: 에브라임의 회개기도, 20: 하나님의 응답.

19. 에브라임은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 보면서 무엇과 닮았다고 하는가?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멍에에 익숙하기까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벗어 던지려고 날뛰던 모습이 바로 자기들의 모습이었단다.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 벗어던지려고 애를 썼겠지! 이것이 어렸을 때의 치욕이다. 브라를 처음 착용한 여학생, 폴리를 박은 수술환자, 이빨에 무엇을 씌운 치과 환자, 집나간 탕자 ↔ 하나님의 율법, 교회의 법에 익숙한 성도가 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를 매라! 그게 편하다!

20. 야단맞은 후에 잘못을 깨달은 자녀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는 뭐라고 말할까?

    사랑한다고, 기쁘다고 말한다: 이런 고백도 가능할 것이다, ‘너를 야단을 치거나 쫓아내고 나리면 생각(고민, 걱정)이 얼마나 많아지는지 아느냐(=깊이 생각하노라)? 고생한 것을 반드시 갚아주마.’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꼭 이러하다.

21. 길표는 요즈음 말로 하면 표지판이나 안내판이겠지만 옛날에는 사막이나 험한 산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푯말, 돌무더기 따위의 표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로’ 즉 ‘네가 전에 가던 길’이란 무슨 길일까?

    포로로 끌려가던 길: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그 길을 잘 기억해 두어라(착념하라).

22. 이스라엘을 가리켜 처녀라고 했다가(21), 패역한 딸(22)이라고 한다. 어느 말이 맞는 거야?

    둘 다: 실상은 패역한 딸이다. 온갖 음란한 짓을 다 하던 이스라엘을 가리켜 처녀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처녀일 수가 있는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겠단다!

23.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중국 사람들은 금방 좋을 好(호 → 女男)자를 연상할지 모르겠다.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 ‘여호와께서 새 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새 일이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일일까?

    좋은 일: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좋은 일을 가리키는 것은 틀림없다. 중국사람들이 이렇게 이해하기 쉽겠다. 전쟁과 포로로 남자들이 다 사라진 상황에서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은 문자 그대로 좋은 일일 수밖에 없다(사 4:1). ‘새 일’이 이스라엘의 회복, 영적인 이스라엘(교회)의 회복, 하나님 나라의 완성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남자를 안는다’는 것도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이스라엘의 강성한 국력,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 등등). 한 마디로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밖에!

24. 북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노래하던 선지자는 이제 남 유다의 회복에 대해서 노래한다. 그 후에는 전체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한다. 이런 내용을 따라서 본문을 구분해보자.

    1-22: 북 이스라엘, 23-26: 남 유다, 27-40: 전체 이스라엘(이스라엘과 유다).

25.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자가 돌아올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 대해서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란다(23). 그러면 그 전에는 뭐라고 했었을까?

    우상에게 복을 빌었으니, 글쎄? 요는 우상에게 복을 빌던 그들이 하나님께 복을 빌게 되리라는 것이다.

26.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자가 돌아올 때에 유다와 그 모든 성읍에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 함께 있을 것이란다(24). 그러면 그 전에는 농부와 목자가 없었던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황무지가 되고 시랑과 이리가 노는 곳이 되었었다(렘 9:11, 10:22, 27:17).

27.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메시지를 꿈을 통해서 받은 모양이다. 이런 말씀을 받으니 잠이 달았더란다(26, 시 127:2).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생애에 흔한 일이 아니다. 평소 멸망을 예언할 때에는 심정이 어땠을까? 가장 대표적인 고백을 생각해보자.

    렘 20:7-9: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8. 하나님께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는 것은 농부가 씨를 뿌려 곡식을 풍성하게 거두는 것처럼 사람과 짐승을 번성케 하겠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열심으로 씨를 뿌리실까?

    징계하고 파괴할 때(15:1-9, 18:16, 29:17-18)의 열심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 정도로 철저하게 징계하시던 분이 회복시킬 때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한다면 하시는 분이시다. 대충 하시는 분이 아니다.

29.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이 잘못해서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틀림없이 조상 탓을 했을 것이다. 뭐라고 하면서 조상 탓을 했을까?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말도 안되는 말인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면 더 이상 남의 탓을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가 시리지 않으니 말이다. 본래 성경에는 연좌제라는 것이 없다(신 24:16). 출 20:5의 ‘삼 사대’는 연좌제의 의미가 아니라 악의 자연스러운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가 미치는 천대와 비교해서 이해해야 한다.

30. 새언약을 세우리라고 하신다(31). 언제 맺은 언약을 갱신하려고 하시는가?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 곧 출애굽 때 세운 것이다. 구체적인 장면은 출 19장에 있고 세부 내용은 출 20장 이후와 레위기 등이다. 흔히 모세 언약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언약이다.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파기하려고 한다고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31. 언약을 갱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켰음에도(=남편이 되었어도)이스라엘이 파기하였기 때문: 사실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임에도 배반해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 율법에 매어달렸다. 이 율법에 손을 대는 자는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 율법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바리새인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32. 새언약은 이전 언약과 비교하면 무엇이 다른가?

    계명을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새기겠단다(33, 고후 3:3): 율법을 돌이나 책이 아닌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는 새로운 백성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이 충만할 것이다(사 11:9).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충분하게 알 것이다(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하는 신인류(고후 5:17),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백성의 탄생을 염두에 둔 새언약이다(눅 22:20).

33.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겼더라도 징계를 받고 돌이키면 그 언약이 계속 유효한 것 아닌가? 굳이 새언약을 세워야 하는가?

    용서하고 그대로 언약을 유지한다면 결국은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예레미야의 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즉, 처음 언약의 내용 중에는 저주조항이 있었는데(11:3).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저주조항이 가동되었으므로(11:8),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11:14). 모세언약을 통해서 도저히 일을 이룰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으로 새롭게 일을 이루어 가시겠다는 선언이다. 출애굽보다 더 큰 이적,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이 일을 완성하시겠다는 선언이다.

34. 36절의 ‘이 규정이 폐할진대’라는 말과 가장 유사한 속담이 있다면 무엇인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해, 달, 별, 파도가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자기 자리를 떠난다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를 폐하게 될 것이다. 즉,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는 보증이다.

35. 하늘을 측량할 수 있을까? 땅의 기초는 어디일까?

    모른다: 예레미야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당시에는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해서 알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이 이렇게 발달한 오늘날에는 해답을 좀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하늘의 크기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무한대일 뿐이다. 땅의 기초는 우주공간? 우주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을 뿐이다. 이 비밀을 인간이 알아낼 수 없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36.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 북동쪽 모퉁이에 있었다(느 3:1, 슥 4:10). 그러나 다른 지역명을 알지 못하므로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메시지가 우리에게는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다. 상상을 해볼 수밖에!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철저하게 파괴된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전복되지 않을 것이란 점: 회복된 이스라엘은 영원히 하나님의 도성이 될 것이다. 이 구절을 오늘의 예루살렘에 적용시킬 필요가 없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얘기다.

37. ‘날이 이르리니’라는 표현이 후반부에 어디에서 반복되는가?

    새 단락이 시작되는 곳 즉, 27, 31, 38: 우리 번역에는 분명하게 들어나지 않으나 원문에는 시작하는 첫 머리에 선언하듯이 붙어 있다. ‘보라, 그 날이 오리니 ...’ 하는 식이다. 하나님께서도 몹시 기대하고 있는 특별한 날이 있음을 말한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특별한 사랑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도 이 모든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는 그 날이 얼마나 감격적일까? 6절에도 있지만 표현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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