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9장


1. 포로로 옮겨간 자 중에 남아 있는 자란? ‘남아 있는’이 아니고 ‘속해 있는’ 아닌가?

    포로로 잡혀간 자 중에 살아 남은 자란 뜻이다: 나중에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살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처형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21-22). 예루살렘에서 편지를 보냈으니 받는 자는 예루살렘에 있지 않다.

2.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이 2절에도 있고, 3절에도 있다. 내용상 어떻게 다를까?

    2절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고, 3절은 평화 사절이다!

3. 여고니야가 잡혀간 때라면 몇차 포로인가?

    2차 포로: 1차 포로 때의 왕은 여호야김, 3차 포로 때는 시드기야이다. 여고니야가 사로잡혀 갈 때 ‘국모’가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실권을 가진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여고니야는 어렸기 때문에 실권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훗날 바벨론에서 왕으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4. 예레미야의 편지를 전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사해보라.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사반은 요시야 왕 18년 힐기야 대제사장에게 백성이 바친 은으로 성전 수리를 하라는 왕명을 전했다. 힐기야는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 사반에게서 율법에 기록된 저주와 축복에 대한 말씀을 듣자, 왕은 옷을 찢고 비통해 하였다(왕하 22:3-13, 대하 34:8-21). 이런 사반과 힐기야의 아들이었으므로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5. 비록 포로로 잡혀갔지만 2년 내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돌아올 것을 포기하고 바벨론에 정착하란다. 포로 초기에는 누구의 말이 더 애국자같을까? 누구의 말을 더 좋아했을까?

    정착하라는 예레미야의 말은 매국노의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일제 강점 초기에 항일 투쟁을 하던 많은 애국자들이 후일에 변절한 이유 중에는 일본이 망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에 일본에 협조하라고 하는 말만큼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마 백성들은 이런 소리를 했을 것이다. ‘도대체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만 골라가면서 말하는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백성들이 하나님을 져버리면 선지자가 괴로울 수밖에 없다.

6.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전하는 예레미야의 편지를 요약하면 ‘1) 정착하고 번성하라, 2) 바벨론의 평안을 빌라, 3) 거짓 메시지에 속지 말라, 4) 70년이 차기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 포함하는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찾으라(11-14):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복해야 한다.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수밖에 없다. 내 병이 왜 이렇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나를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으라는 것이다.

7. 바벨론은 자신들을 포로로 잡아온 나라인데 이 나라가 평안하도록 기도해야 되나? 이 나라가 강성하다는 것은 자신들이 놓여날 희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일제 시대에 목사가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기한을 채워야 한다. 그 기한이 차면 하나님께서 돌려보내실 것이다. 실제로 70년 만에 바벨론이 멸망할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일이다(BC 612-BC 539). 그 동안에는 바벨론이 평안한 것이 자신들의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자세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특별한 경우이지, 다른 모든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일은 아니다. 특히 일제시대 같은 경우에는 일제의 강성함이 곧 교회를 깨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경우와는 같을 수 없다.

8. 선지자도 복술자도 꿈도 믿지 말라는 말씀이 중간에 왜 들어왔을까?

    그들의 메시지가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과 반대였을 것이다. 예컨데, 얼마 가지 않아서 바벨론이 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곧 석방시켜주실 것이다는 따위의 달콤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9.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다른 선지자가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분간하지?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판별이 쉽다. 그게 안돼서 이렇게 포로로 잡혀왔는데? 이제는 지나온 과거의 메시지와 일이 되어진 형편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예레미야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0. 훗날, 예레미야가 전한 이 메시지, ‘70년이 차면 ...’(25:11-12)을 읽고 돌아갈 때가 된 줄 깨달은 사람은 누구일까?

    다니엘(단 9:1-2): 돌아갈 때가 된 것을 깨닫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11.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라’고 권했고 이제는 ‘바벨론에서 정착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평안(11) =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12-13): 수도 없이 매를 들기도 하고 야단을 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아닌 하나님의 포로가 돼라.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자는 행복하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본심을 읽지 못하면 허사다.

12. 나의 생각은 내가 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한다면?

    나의 진심을 아무도 모른다.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13. 다음 구절은 예수님의 어느 말씀과 비슷한가?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산상보훈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마 7:7-8): 구약의 하나님은 엄격하고, 야단만 치는 것 같아도 실상은 신약에서 볼 수 있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찾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다. 반면에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열심은 얼마나 허무한가!

14.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하는 말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고(15)하는 그 선지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아합과 시드기야(21-22!): 거짓 선지자 때문에 망했는데... 포로로 잡혀가서도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다니...! 질기다.

15. 16-19절은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즉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다(16).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말씀을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하는 이유가 뭘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9-20):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여호와께서 부지런히 보낸 선지자들을 말을 듣지 않은 결과가 이렇게 된 것 아니냐? 그러니 지금이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16. 이스라엘의 대부분을 포로로 보내놓고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뒤쫓아 가신다. 칼과 기근과 염병을 가지고(렘 14:12, 15:2-3, 21:7, 9, 24:10, 27:8, 13, ...). 하나님은 왜 이렇게 지독하신가?

    하나님의 Endless Love 때문이다. 적당히 포기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배신하는 일에 능하다.

17. 아합과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였는데(21) 느부갓네살이 왜 이들을 화형에 처했을까(22)? 이들의 죄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마어마하지만 느부갓네살이 보기에는 별로 죄가 될 것 같지 않은데?

    이들의 예언이 아마도 반역이나 내란선동죄에 해당하였을 것이다: 전장의 하나냐와 같은 내용, 즉 이스라엘이 곧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18. ‘여호와께서 너로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건 끔찍한 저주다. 흡사한 모양으로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는 표현도 있다(왕하 9:9). 이와 꼭 같은 형식이지만 축복을 빌어준 표현이 있다. 누구와 같기를 바라면 될까? (참고, 룻 4:11, 12, 창 48:20)

    라헬, 레아, 다말(룻 4:11, 12), 에브라임, 므낫세(창 48:20): 아무렴 복의 대명사가 되어야지 어떻게 저주의 대명사가 된단 말인가!

19. 명색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어떻게 음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23)?

    거짓 선지자가 무슨 짓을 못할까? 그렇지만 음행은 꼭 거짓 선지자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자칫 방심하면 아무리 거룩한 자라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단단히 자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나 위험한 것이다. 반드시 거짓 선지자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런 범죄라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 일이다(=나는 아는 자).

20. 느헬람 사람 스마야가 꾸중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벨론에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를 보고 화를 내서 거꾸로 예루살렘의 제사장(스바냐, 죽으리라고 했던 시드기야의 형제?)에게 예레미야를 징계하라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25, 26-28).

21. 스마야가 말하는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는 누구인가?

    예레미야: 가짜가 진짜를 보고 가짜라고 하는 셈이다. 예레미야의 말이 현실로 이루어져가는 데도 여전히 미친 자 취급을 하다니...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배워도, 들어도, 보아도 헛일이다.

22. 바벨론으로 가는 또 다른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기록되었는가?

    스마야와 그 집안이 망하리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본래 죽을 죄이다(신 13:5). 어쩌면 스마야가 스바냐에게 보낸 글에서 요구한 것이 바로 이 구절의 시행이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을 향하여 칼을 겨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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