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7장


1. 1절의 여호야김은 시드기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본문에서 근거를 찾아보자.

    3, 12, 20, (28:1)과 비교하면 그렇다.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여호야긴)가 사로잡혀간 이후의 일이다(20). 아마 필사자의 오기인 것 같다.

2. 선지자가 소처럼 멍에를 목에 메고 나타났다면 희한한 구경거리 아닐까?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시청각 교재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렇게 멍에를 메게 될 것이다는 상징적 행위이다. 하나님은 시청각 교재를 잘 활용하신 분이시다. 선지자들은 기꺼이 교재가 되어야 했다.

3. 유다 왕 시드기야는 유다 최후의 왕이다. 거의 다 망해가는 허약한 나라인데 웬 사신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 왔을까?

    아마도 합세하여 바벨론에 대항하는 방안을 연구하러 모였을 것이다. 5-7절의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하면 그렇다. 아마 시드기야가 이 모임의 주동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에 목전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왕하 25:7).

4. 시드기야를 만나러 온 사신들에게 예레미야가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어떤 선물인가?

    줄과 멍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 줄과 멍에에 묶여서 바벨론으로 잡혀가리라는 것이다. 바벨론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방법을 연구하는 마당에 이랬으니...

5.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창조 이후에는 무엇을 하실까?

    땅을 나누어주심(5, 6):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창조만 하시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흘러가도록 버려두신 것은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도 크게 보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법칙이다. 이것이 왕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기초(전제조건)이다.

6. 느부갓네살은 들짐승까지 부리는가?(6)

    땅도 들짐승도 느부갓네살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나라가 패망한 후에 황폐화되면 들짐승이 번성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다.

7.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이 예뻐서 복을 주신 것이 아니다. 세상을 징계하는 도구로 삼으셨을 뿐이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하면서 바벨론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고 하시는가?

    때가 되면 바벨론도 망하고 다른 왕을 섬기게 될 것이다(7). 바벨론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가 아니다. 임무가 끝나면 폐기처분될 도구일 뿐이다.

8.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는 나라들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진멸시키는 자는 누구인가?

    겉으로는 느부갓네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8절의 ‘내가 그의 손으로’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손은 단순한 도구일 뿐이다. 부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9. 온 땅의 주는 여호와, 그가 온 세상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었다. 그러니 열방의 왕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라.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판에 다른 이방 나라가 들을까?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가 애처롭다. 각설하고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이렇게 처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상숭배(9): 각자가 섬기는 신들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다. 선지자, 복술, 꿈꾸는 자, 술사, 요술객을 듣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들 때문에 땅에서 멀리 떠나게 된다(고향에서 사로잡혀 낯선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의미함).

10.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겨라? 어쩌면 매국노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인데?

    그렇더라도 선지자는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듣기에 거북스런 메시지를 전한다. 얼마나 힘든 일일까? 다른 선지자들은 백성들, 특히 기득권자들이 좋아할 말을 전한다. 진실(하나님의 뜻)보다는 듣고 싶어하는 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가!

11. 시드기야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문제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 것이냐 다른 선지자의 말을 들을 것이냐?(12-15) 아무래도 듣기 좋은 것은 다른 선지자들의 말인데... 어떡하지?

    어차피 우리 인생은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나도 잘 모르는 선택이다. 단지 그런 선택 속에 들어와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감사하고, 놀랄 뿐이다.

12. ‘왕과 왕의 백성?’(13)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하나님께서 화가 몹시 나신 모양이다: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너같은 자식 둔 적 없다’면서 화를 내시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방나라의 항복을 권고하던 예레미야가 이제 이스라엘을 향해서 똑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이스라엘도 이방나라와 똑 같이 취급하시겠다는 의미이다.

13. 여호와의 집 기구가 언제 바벨론으로 갔지?(16)

    여고니야를 사로잡아 갈 때(20, 왕하 24:13): 바벨론의 1차 침공을 말한다. 성전의 중요한 기구들은 이미 다 바벨론으로 옮겨져버렸다. 남은 것은 소품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곧 이 기구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16) 결국은 남은 것마저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14.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17) 하나님을 섬겨야 살지, 성경에 무슨 이런 구절이 다 있지?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어 이스라엘의 왕을 두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하도 원하기에 왕을 세워주셨다. 그런 자기 백성을 이방왕에게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자녀를 경찰에 고발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할까? 이렇게 해서라도 인간이 되기만 한다면...

15.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란 주로 기둥들과 놋바다와 받침들이다. 어떤 느낌을 주는가?

    알맹이는 다 가져가고 껍데기만 남겨둔 모습이다. 그나마 이것들도 다 옮겨질 것이다.

16. 바벨론에 항복하라,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남아 있는 기구들마저 바벨론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이 곳에 다시 두리라: 성전 기구들이 돌아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다는 뜻이다. 항복하라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심판을 말하면서도 반드시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빠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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