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6장


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라면 다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25장은 언제 이야기였지?

    여호야김 4년(느부갓네살 원년): 24장은 고니야(여호야긴)가 바벨론으로 잡혀간 때(여호야김 11년), 25장은 여호야김 4년, 26장은 여호야김 즉위 초(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잡혀간 때), 그러니까 역순이다. 이 때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사역을 시작한지 18년 되던 해이다(요시야 13년에 소명을 받았고, 요시야는 31년간 통치했다). 그 이전까지는 요시야 왕과 더불어 사역에 어려움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며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참조 1:1-3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기간을 둘로 나눈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2. 여전히 예배하는 자가 있었네(2)? 예루살렘에 의인(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이 한 사람도 없어서 망했는데(5:1)?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는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다.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주님은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셨다. 믿는 흉내만 낼 것이 아니라 진짜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3.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오늘날 일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란 형태로 주어져 있으므로 가감할 일이 없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까?

    가감하는 자를 용납하지 말라. 의미를 왜곡하지 말라. 말씀대로 실천하라: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할 수 없는 신실한 선지자였을텐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그런 유혹을 받을만큼 강력한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 아닐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강한 유혹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4.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하시는 말씀 중에서(2-3) 아무래도 하나님답지 않아 보이는 단어를 하나만 찾아보자.

    혹시: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못하실 일이 없을텐데 ‘혹시’가 뭐야? 절대적 주권을 가진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실 때 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을 소중하게 만드셔서 기계적으로 다루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회개할 기회를 한번이라도 더 주시려고 하신다.

5. 재앙이 내리고 안 내리는 것은 누구에게 달린 것인가? 절대적 주권을 가진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인가?

    백성들의 태도(3):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시지 않는다. 백성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재앙을 피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완력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6.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은 인간이 만든 인조신이다. 그들의 사상이나 가르침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결코 사람이 지어낸 글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서 알게 하셨다(5-6). 완악해서 듣지 않는데도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내셨다. 그래서 성경을 계시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사람의 뜻과 전혀 다른 내용들이 많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의 생각과 달라서 놀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7. 예루살렘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라는 말에 백성들이 크게 반발한다. 내용상으로 뒤이은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로가 어쨌길래?

    9절에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와 같은 뜻이다. 사사시대 말, 엘리 제사장 시절에 법궤를 앞 세우고 블레셋과 싸우다가 법궤를 빼앗기고(삼상 4장) 실로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성전모독죄가 되어 죽임을 당해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8.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했는데 왜 죽어야 하나(8)?

    예레미야의 말을 여호와의 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 그러면 예레미야의 죄는 성전모독죄가 된다. ‘감히 여호와의 성전이 실로 같이 되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을 것이라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라는 말이다. 제대로 믿지도 않으면서 큰 소리만 치다니.

9. 죽이자고 난리를 치면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또 말할 기회를 준 것(12-15)은 웬 선심인가?

    일종의 재판 과정이다.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백성들을 부추겼고 소요가 일어나자(9) 왕궁에 있던 방백들이 조사하러 왔다가 재판을 연 셈이다. 방백들 앞에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고발을 하고(11), 예레미야가 진술하자(12-15), 장로 중 몇 사람이 변호하는 셈이다(17-23).

10. 백성들이 웃긴다.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가(8) 죽음이 부당하다고 한다(16). 백성들은 왜 이랬다 저랬다 할까?

    대중심리라는 게 원래 중심없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이유도 걸작이다. 똑같은 말을 듣고도 이번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말하였으니’ 죽음이 부당하단다.


11.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듣고 격분한 것은 예레미야가 전한 말 중에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이 열방의 저주거리가 될 것’이라는 부분이다(11, 6, 12). 그러나 정작 새겨들어야 할 말은 그게 아니라 무엇인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이런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13, 5절의 ‘듣지 아니하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데도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만 열심히 외운다. 예레미야에게 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도 제발 돌이켜서 이런 재앙을 받지 말라는 것인데...

12. 인간적으로 보면 선지자는 불쌍하다. 자신의 죽음(14)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15): 나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내가 전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잊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외치는 이런 태도가 방백들과 백성들에게 먹혀든 것일까(16)? 예레미야를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훨씬 더 잘 알아야 하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하는데 정치인인 방백들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아네? 별 일인가? 부패한 전문가는 문외한보다 더 어리석고 위험하다.

13. 몇 명의 장로들이 백성들에게 한 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18-19: 개역 성경은 23절 끝에 ‘하니라’고 해서 23절까지 장로들의 말처럼 번역해두었으나 대부분의 역본들은 18-19절만 장로들의 발언으로 본다. 아무래도 우리야 선지자의 일이 예레미야보다 앞 선 것은 아닌 모양이다(장로들의 인용이라기보다는 기록자의 삽입이란 뜻). 어쨌거나 예레미야의 편이 된 사람도 있네!

14. 장로들의 이 발언을 요즈음 말로 하면 무엇인가?

    판례(전례): 전례대로 해야 한다는 말은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법에서 판례는 일종의 법이다.

15. 여기 모레셋 사람 미가는 우리가 아는 미가 선지자일까?

    맞다: 미 1:1에 미가의 신분에 대한 말씀이 있고, 미 3:12의 메시지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8).

16. 본문이 우리야의 죽음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레미야의 생명도 그만큼 위태로웠다: 당시 예레미야가 처해 있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야의 행동과 비교해보면 예레미야가 얼마나 의연하게 말씀을 전해는지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가 예레미야 혼자는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7. 국가 간에 범죄자의 신병을 넘겨주고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애굽으로 도망간 우리야를 사자들이 잡아 왔다는 것은 당시에 애굽과 사이가 좋았다는 말인가? 여호야김 왕의 아버지 요시야는 바로와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운 이가 바로다. 말하자면 애굽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으니 겉으로는 좋은 사이다. 애굽을 믿고 버티다가 바벨론에 침략을 당한 것이 여호야김 4년이다. 그러므로 우리야 사건도 여호야김 초에 일어난 일, 즉 본문의 예레미야 사건과 거의 동시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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