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3장


1. 선지자는 하나님을 목장 주인에 비유하고 있다. 목장 주인이 멀리 떠났다 돌아왔더니 자신의 목장이 엉망진창이 되고 양떼는 다 흩어져 버렸다. 분노해서 외치는 다음 말들을 현대식으로 바꾸어보자.

    1)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 어느 놈들이 회사를 말아 먹었어? 내 돈 다 어디 갔어?

    2)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 내가 맡긴 돈을 다 떼어먹겠다고? 죽을 줄 알아라!

    3)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 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 그런다고 내가 망할 줄 아느냐? 쓸만한 인재들을 다시 모아서 완벽하게 회사를 살리겠다.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아가 메시야 시대의 회복을 말한다.

2. 이 목자들(원어는 복수형임)이 얼마나 고약한 목자들이었는가?

    목자의 임무는 양떼를 지키는 것인데 이들은 양 무리를 흩으며 몰아내고 돌보지 않았다. 완전히 미친 것 아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그랬다는 말이다. 앞장에서 언급한 유다의 마지막 네 왕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겠다. 차라리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기지!

3. 흩어진 양 무리를 다시 돌아오게 하고 번성케 하고 목자들을 세워서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축이 나지 않게 하실 능력이 있다면 진작에 올바른 목자들을 세우지 않으셨을까?

    그런 결말이 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사람을 사랑해서 스스로 고생길로 들어선 하나님이시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고약한 목자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변하기도 했다. 우상숭배, 욕심, 악의 유혹에 약한 인간을 사랑한 탓이다.

4.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겠다면 현재 다윗의 모습은 어떠한가?

    가지도 하나 남은 것 없이 베여진 그루터기. 뿌리는 곧 뽑힐 모양이다. 가지는 잘려서 전부 팔려갔고 줄기나 뿌리도 제대로 박혀있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태에 다시 가지가 난다고?

5. 하나님께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시겠다는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이 왜 망했다는 얘긴가?

    지도자가 어리석어서 공평치도 정의를 행치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평과 정의를 행치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새로운 왕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것이 지혜다.

6. 유다와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나라다. 한 때는 우리나라의 남북처럼 앙숙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이제는 하나가 되었나(6)?

    망함으로: 둘 다 망해서 바벨론의 일부가 되었다. 멋진 통일이네!

7. 왕의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라? 하나님의 이름이 같은데? 후일에 이렇게 불려질만한 왕은 누구인가?

    예수 밖에 없다: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란 얘기다.

8.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한단다. 왜?

    출애굽보다 더 위대한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다(8)는 말씀은 이 일이 출애굽보다 더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무리는 출애굽에 비해서 그렇게 많지 않다. 선지자가 과장한 것인가? 이 회복의 진짜 의미는 메시야 시대에 만 백성이 교회로 나아올 것을 가리킨다. 출애굽보다 더 위대한 회복이다.

[ 23:9-40 ]

9. 23:9-40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비난이다. 예레미야의 중심이 상하며 모든 뼈가 떨리며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은 이유가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란다(9).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이 잘못일 리는 없을텐데 왜 그렇지?

    세상이 여호와의 뜻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모르면 마음도 편할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 세상은 영 딴판이지!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던지 관심도 없으면 편한데 관심과 애정은 있는데 교회가 말씀대로 나아가지 않으면 괴롭다.

10. 행음하는 자가 가득한데 왜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를까?

    행음하는 이유가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하는 행위, 즉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신들의 성적 행위가 곧 이 땅에 풍요로운 결실로 나타난다는 그릇된 믿음에 따른 행위이다. 따라서 징계는 그들이 기대한 것과 반대 양상을 지니는 것이 타당하다. 풍성한 수확을 바라고 바알을 섬겼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땅이 슬퍼하고 초장이 말랐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11.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다(10)는 것은 바알을 숭배하는 자가 가득하다는 말이다. 바알을 숭배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로 과해졌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바알을 숭배하였다(11, 겔 8장):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처음에는 아하스가 그랬지만(왕하 16:11-14) 본격적인 것은 므낫세가 저지른 일이다(왕하 21:4-5). 그들의 악한 행위란 바알을 숭배하는 것이고, 힘쓰는 것은 바알을 섬기려는 노력이다(10).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바알을 위한 노력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흑암 중에 미끄러운 길에서 밀어버린다면 방법이 없다(12).

12. 사마리아 선지자들(13)? 사마리아는 망해버린지 오래 되었는데 무슨 사마리아 선지자들이 있는가?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기 위한 배경인 셈이다: 사마리아 선지자들이야 이미 멸망당해버린 도시의 선지자들이니 악해도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겠지만 예루살렘(서울의) 선지자들의 죄의 영향력은 아주 강하다. 그래서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진다(15)고 한다. 더구나 사마리아가 망하는 것을 보았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13. 사마리아 선지자와 예루살렘 선지자가 어떻게 악했는지 예를 찾아보자.

    사마리아 선지자들: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함(13), 이게 무슨 선지자냐?
    예루살렘 선지자들: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함(14), 악을 행하는 자를 징계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악을 행하는 자가 잘 하는 줄로 알고 더 열심히 했겠지. 그래서 소돔 고모라 백성처럼 되어버렸다.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진다(15)는 말은 그들이 악의 근원이 되었다는 뜻 아닌가!

14.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자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래도 끝까지 선지자라고 한다. 거짓 선지자라고도 하지 않는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날이 있음을 말하는 것 아닐까? 거짓 선지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선지자로서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처럼 보인다.

15. 백성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강퍅하게 행하는 데도 선지자들은 ‘평안하리라, 재앙이 임하지 않으리라’고 했단다(17). 이와 비슷한 현상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철없는 아이들 중에 있을 수 있다: ‘우리 아빠는 내 소원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준다’ 이러면서 얼토당토 않은 고집을 부리는 아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데?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이러면서 잘못을 행하면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의 행위는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면서 하와를 유혹하던 뱀이랑 다를 바 없다.

16.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했어야 했다(18, 22). 하나님의 회의가 어디서 열리는가? 예레미야는 이 회의에 참석했는가?

    회의란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받는 것에 대한 비유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 조회 시간에 말을 잘 듣지 않은 학생이나 직원은 그 날 무슨 실수를 해도 실수하게 마련이다. 뒤늦게 뒷북치거나!

17.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왜 이들은 겁을 내지 않는 걸까?

    하나님의 징계가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이지 않았기 때문: 폭풍과 회리바람이 하나님께서 노하신 탓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방 족속들이 쳐들어 와서 압제를 해도 그것이 자기들의 힘이 약한 탓으로만 여겼지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사사시대에는 그렇게 오래 압제를 당해야 겨우 하나님을 찾았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자신들이 잘못을 해도 징계가 즉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말일에), 혹은 자꾸 미루시니까 겁을 안 내지! 징계를 피하려고 인내하시는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18.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선지자들이 왜 달리지(21)?

    달리는 원동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기 때문: 자동차는 주인의 뜻에 따라 굴러야 한다. 이게 제 멋대로 구르면 사고 밖에 더 나겠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자기 욕심을 부리는 것은 자기 민족을 하나님의 징계 속으로 몰아넣는 짓이다.

19.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 요나도 하나님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으니 다른 선지자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일정한 지역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예레미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특히 23-25)은 탁월한 데가 있었던 셈이다.

20.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들도 아무런 근거없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몽사(꿈을 통한 계시)를 얻어서 그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몽사를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걸까?

    자신들이 얻었다고 하는 몽사가 자신들의 간교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26): 생각하는 대로 보고, 생각하는 대로 꿈꾸는 법이다. 몽사를 받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꿈을 꾸게 된다. 열심히 성경을 읽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말고 계시도 받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몽사를 백성들에게 열심히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행위이다(27).

21. 겨와 밀을 비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밀보다 겨를 더 좋아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는가?

    어느 것이 밀이고, 어느 것이 겨인지 분간을 못하는 게 원인이다: 다른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이 듣기에는 좋아도 영양가가 전혀 없는 거짓 메시지라는 점에서 겨다. 결국은 누구의 말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지 판별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당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열심을 내는 것(봉사는 그래도 다행이지만, 계시나 은사를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위험하다.

22. 23-32절 짧은 글 속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는 말씀이 몇 번 반복되는가?

    7(8, 마지막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를 포함하면)번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하고 계시는가? 여러 말 마시고 그냥 한 방에 끝내시지 않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그래도 용서하시려고 위협(?), 공갈(?)만 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난 글이다.

23. 드디어 하나님께서 불과 방망이로 선지자들을 치시리라고 선언하신다. 이렇게 맞아야 하는 선지자들의 죄가 도대체 무엇인가(30-32)?

    말씀을 도적질한 죄(30), 함부로 혀를 놀린 죄(31,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긴 죄),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한 죄(32): 본질적으로 동일한 죄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말을 전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지게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긴 것이고, 결과적으로 백성을 미혹케 하고 말았다.

24. ‘엄중한 말씀’이란 ‘짐’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백성이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짐스럽게 여겼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는 것이다(33).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짐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짐으로 여겼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짐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짐을 버리겠다고(33), 벌하겠다고(34) 하신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 격이다.

25. 이웃이나 형제에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물어야 하나?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는가? 혹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여호와의 말씀을 엄중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는 뜻인데 이 표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기거나 혹은 조롱하는 투의 말이기 때문이다.

26.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버려야 할 짐으로 여기지 말라(36)고 하는 데도 끝내 그렇게 여긴다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완전히 버림을 당한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릴 뿐 아니라 완전히 내어버린다. 그러면 잊지 못할 치욕을 당할 것이다. 조만간에 닥칠 바벨론에 의한 멸망과 포로로 끌려가는 것(바벨론 유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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