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1장


[시대적 배경] 예레미야는 유다 왕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의 제 십일년 말까지 사역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세운 허수아비 왕이며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역사적으로는 그렇지만 예수님의 족보에는 빠진다. 그러니까 족보상으로는 여호야긴이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그런데도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가 망하고 말았다. BC 588(586에 멸망)에 바벨론의 침공이 있었으니 본문은 그 때의 일이다. 이 때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하다가 시드기야에 의해 투옥되어 있었다(32:2).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세 번이나 유다를 침공했다. 1차 침입은 주전 605년인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애굽의 느고가 하란에서 대전하여 느고가 패하자 유다는 바벨론의 세력권에 들어갔다(그 전에 요시야는 느고에 적대적이었으나 전투에서 패한 느고가 남하하면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하고 여호야김(원래는 엘리아김)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으나 곧 바벨론에 패하고 만다). 여호야김이 생포되고(왕하 24:1),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갔다. 2차 침입은 주전 597년에 있었는데, 여호야긴이 항복하여(왕하 24:2-18), 바벨론의 속국으로 전락함, 3차 침입: 시드기야 11년(왕하 25장)에 있었는데 이전의 침공과 달리 예루살렘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1.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임멜의 아들 바스훌(20장)과 동명이인이다. 이 바스훌이 더 악랄하다(38:1-13). 어쨌거나 이런 날도 있네! 아쉬우면 찾아와서 부탁도 하고! 그런 날이 올 거라고 했잖아! 예레미야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끔찍한 결망을 예고하는 선지자는 마음이 어떨까?

    기어코 그 날이 오는구나!: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속이 시원했을까? 기쁘진 않았을 것이다. 심판날이니까! 자신의 예언이 이루어져도 아프다니!

2.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던 시드기야가 ‘여호와께서 혹시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고 말하는 것(2)은 왜 그럴까?

    시드기야가 보기에는 전해 오는 말에 그런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1세기 전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했다가 몰살을 당하고 돌아간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9장). 진작 그런 사실을 믿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3.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 좋은 답변을 주시지 왜 하나님께서 도로 이스라엘을 치겠다고 하시는가?

    때가 있다. 회개하라고 할 때 해야지, 이제는 징계가 시작되었다. 바벨론의 침공은 유다를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더구나 시드기야의 요청은 진정한 회개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4. 너희 손에 가진 병기를 돌이키겠다(4)는 것은 ‘병기를 회수하겠다’는 말이다. 무기만 빼앗아 버리면 끝나나?

    그걸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유다를 치신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치시는 무기가 ‘든 손과 강한 팔’이다(5).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하여 유다를 치시는 모습이다. 원래 ‘강한 손과 편 팔’은 애굽이나 다른 가나안 족속을 칠 때 사용하시던 것이다(신 4:34, 5:15, 7:19). 그 무서운 손과 팔이 이제는 유다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염병까지 동원하셨다(6). 고대에 이것은 적국의 침입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바벨론 군대는 그저 뒤치다꺼리만 할 뿐이다(7). 시드기야의 눈에는 바벨론이 문제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더 큰 문제다.

5. 신 32:15-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길이 여러 가지인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한 가지 길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길뿐이다. 저주는 다른 길로 벗어나지 말라고 막아둔 보조수단이지 길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는(8-10) 하나님께서 몇 가지 길을 두셨는가?

    여전히 한 가지 길, 죽는 길 뿐이다: 이제 본격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으니 살아날 길이 없다. 살아도 포로로 잡혀서,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앞에는 생명의 길이라도 해도 진정한 생명의 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때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통하여 또 다른 회복의 길을 숨겨두셨다. 그들 중에서 일부가 돌아오게 되어 회복의 길을 잇는다.

6. 생명을 ‘노략한 것 같이 얻으리라’는 말은 ‘그저 주우리라’는 말이다. 바벨론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것이다. 승산없는 싸움이라도 항복을 권하기가 쉽지 않다. 끝까지 싸우자고 하는 것이 애국자요 용감해 보인다. 병자호란 때 주전파(김상헌: 전후 청에 끌려가 피살됨)와 주화파(최명길) 중에 누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것일까? 항복하자는 주화파는 자칫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린다. 예레미야는 이런 주장을 한 탓에 계속해서 옥에 갇히거나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훗날에 덕을 본 것도 있지 않을까?

    후일, 바벨론에 끌려가다가 도중에 풀려난 것(39:11-14, 40:4): 아마도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가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BC 586년 예루살렘의 함락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의 처우에 호의를 베풀었다.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사로잡혀 가던 예레미야를 도중 라마에서 석방하고 바벨론으로 가면 선대할 것과, 귀국해도 무관하다는 자유 선택권을 허락했다. 그는 바벨론에서 우대받는 것보다 자기 동족과 같이 고난당하는 것을 택하여 총독 그다랴에게 돌아가 백성들 속에서 살았다. 시위대장은 예레미야에게 양식과 선물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예상하거나 노리던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다. 주전파도 주화파도 아니다. 하나님파였을 뿐이다.

7. 하나님의 얼굴이 향하는 것은 복인가 화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복이지만 죄인에게는 화다: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은 심판이고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것은 복이다. 출 20:5의 ‘죄를 갚는다’는 말과 출 4:31의 ‘권고하신다’는 말은 같은 단어(파카드) ‘방문하다’는 뜻이다.

8.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왕이 해야 할 최고의 의무이자 사명은 무엇인가?

    공평한 판결: 다윗을 통해서 이 땅에 공의를 실현시키려는 하나님의 노력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가장 빛을 발했다. 솔로몬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신 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딱 드는 것을 구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다윗과 솔로몬의 후예들의 공의를 굽게 했으니...

9. ‘누가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 거처에 들어 오리요?’라고 기고만장한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왜?

    예루살렘 거민들: 문맥을 보면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멸망(4-7)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이란 ‘깊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평평한 반석 위에 세워진 성읍의 거민’이라는 뜻이다.

10. 예루살렘은 깊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산꼭대기에 세워진 성이다. 누가 감히 이런 성읍을 침공하겠는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나는 네 대적이라’: 이건 기가 막히는 말이다. 하나님이 대적이라면 아무리 예루살렘이 난공불락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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