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장


1. 예레미야는 재야 인사이고 바스훌은 현직에 있는 성전 감독이다. 왜 하나님은 힘 있는 제사장을 불러서 일을 맡기지 않고 힘도 없는 예레미야를 불러서 이런 일을 맡기시는가? 그러니까 아무도 말을 안 듣지!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자나 지혜자를 동원하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미련한 자를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신다(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드온의 군사들이 너무 많다고 돌려보내라는 것(삿 7:2)이나 이스라엘의 왕은 말을 너무 많이 가지지 말라(신 17:16)는 말씀이나 동일하다.

2.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메시지를 외쳤는데 갑자기 때리고 착고에 채웠을까?

    아마도 장소의 문제일 것: 이전에는 거리나 성문, 혹은 힌놈 골짜기에서 외쳤는데 이제는 성전에서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성전을 맡아 있는 바스훌이 그냥 있을 수 없었던 게지. 1:10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열방만국 위에 세웠다. 겨우 성전을 맡은 바스훌이 까불고 있는 셈이다.

3.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대로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마골밋사빕이 무슨 뜻인가(4, 6절을 참고)? 왜 그렇게 불리게 되는가?

    사방으로 두려움(참고 6:25): 바스훌 때문에 사방의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떨게 된다는 말이다. 그가 행한 거짓말 때문에 모두가 이런 비극을 당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6c)? 유다 멸망의 책임을 다 뒤집어 쓴 꼴이다.

4. 예레미야를 징계한 바스훌이 받을 징계를 요약 한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눈으로 목도하는 것, 직접 체험하는 것. 29:24-29에 보면 바스훌이 하던 일을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가 맡은 것 같다(포로지에서 스마야가 보낸 글이 스바냐에 이른 것). 그러면 바벨론이 처음 침공하던 때에 바스훌이 사로잡혀 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5. 바스훌의 죄가 무엇인가?

    거짓 예언을 한 죄(6): ‘성전이 우리에게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냐?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 제대로 섬기지도 않으면서 이 따위 확신이나 가지다니! 예레미야가 말한 것은 전혀 거짓말이라고 한 죄다.

6. 원수들이 예루살렘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물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는 말을 유대인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이 탈취물 속에는 성전의 보물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에게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7. 7절의 ‘권유’는 ‘속이다, 유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속았다는 말 아냐?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일종의 반항 아닌가?

    못한다고 했는데도(1:4-10) 하라고 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어요? 상황이 너무나 힘들어서 해보는 말 아닐까? 모세도 그러다가 쫓겨가서 결국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갈멜산상의 엘리야는 위대했지만 이내 이세벨에게 쫓기면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다. 하나님의 종은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도 한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기도 하고...

8. 선지자가 왜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을까?

    ‘이스라엘이 강포하다, 그러다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종일토록 외치고 다녀도 치욕과 모욕거리가 될 뿐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말이다. 아무리 외쳐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외쳐야 하다니!

9. 무식하면 용감하다거나 모르는 게 상책이란 말이 있다. 선지자가 견딜 수 없도록 답답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외치자니 치욕과 모욕거리만 되고, 잠잠하자니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 아는 사람이 나서야 하고 아는 사람이 참을 수밖에 없다.

10. 10절의 ‘사방의 두려움’이란 바스훌의 개명된 이름 마골밋사빕이다.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보고 이 말을 쓰는가?

    무리가 예레미야를 향하여: 바스훌에게 붙여주었던 그 이름을 거꾸로 예레미야를 조롱하는데 사용하였다.

11. 그래도 다른 제사장들이 비난하는 것이나 다른 무리들이 비난하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이제는 누구까지 나서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가(10)? 이런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친한 벗들: 이쯤되면 예레미야가 잘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주위의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것은 제고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할 때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확신이었다.

    이런 단절감과 소외감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뿐이었다(11).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맞서서 싸울 수 있었던 종교개혁자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12. 선지자는 몹시 아프다. 동족의 냉대, 제사장들의 따돌림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친한 벗들조차 자신을 넘어뜨리려고 함정을 판다.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그런데 불타는 사명감은 웬 말인가? 이러면 누구를 어떻게 원망하지?

    태어난 게 죄지! 이것은 하나님께 반항 아닌가? 이런 처절한 낙망 가운데서 다시금 하나님을 붙들고 일어서는 것이 신앙인이다(12). 자포자기냐 하나님이냐의 갈림길이다.

13. 13절은 아무래도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 느닷없이 가난한 자의 생명을 구원한 내용이 왜 나올까?

    기존의 찬양 가사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설교 도중에 적절한 찬양을 한 곡 불렀는데 실제로는 의미가 통하는데 그것을 글로 적어버리면 문맥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14.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부모를 저주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죽을 죄다(출 21:17, 레 20:9). 그래서 애꿎은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다. 욥이 생각난다(욥 3장).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럴까!

15.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소돔과 고모라: 자기의 출생 소식을 전한 자가 이렇게 저주를 받았더라면? 진짜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걸까? 극한 고통에 대한 우회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이므로 특정인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본다.

16. 선지자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이렇게 슬퍼해도 될까? 어느 효부상을 탄 며느리가 시상식 뒤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누구는 효부가 되고 싶어서 효부가 된 줄 아느냐? 몸서리가 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 안 받고 효부 안 할란다.’ 예레미야도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

    아무런 대답도 않으셨다. 힘들어서 그런 비명을 지르기는 하지만 곧 다시 일어나리란 것을 알고 계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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