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장


1. 예레미야는 재야 인사이고 바스훌은 현직에 있는 성전 감독이다. 왜 하나님은 힘 있는 제사장을 불러서 일을 맡기지 않고 힘도 없는 예레미야를 불러서 이런 일을 맡기시는가? 그러니까 아무도 말을 안 듣지!

2.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메시지를 외쳤는데 갑자기 때리고 착고에 채웠을까?

3.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대로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마골밋사빕이 무슨 뜻인가(4, 6절을 참고)? 왜 그렇게 불리게 되는가?

4. 예레미야를 징계한 바스훌이 받을 징계를 요약 한다면?

5. 바스훌의 죄가 무엇인가?

6. 원수들이 예루살렘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물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는 말을 유대인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7. 7절의 ‘권유’는 ‘속이다, 유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속았다는 말 아냐?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일종의 반항 아닌가?

8. 선지자가 왜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을까?

9. 무식하면 용감하다거나 모르는 게 상책이란 말이 있다. 선지자가 견딜 수 없도록 답답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10. 10절의 ‘사방의 두려움’이란 바스훌의 개명된 이름 마골밋사빕이다.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보고 이 말을 쓰는가?

11. 그래도 다른 제사장들이 비난하는 것이나 다른 무리들이 비난하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이제는 누구까지 나서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가(10)? 이런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12. 선지자는 몹시 아프다. 동족의 냉대, 제사장들의 따돌림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친한 벗들조차 자신을 넘어뜨리려고 함정을 판다.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그런데 불타는 사명감은 웬 말인가? 이러면 누구를 어떻게 원망하지?

13. 13절은 아무래도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 느닷없이 가난한 자의 생명을 구원한 내용이 왜 나올까?

14.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부모를 저주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15.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16. 선지자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이렇게 슬퍼해도 될까? 어느 효부상을 탄 며느리가 시상식 뒤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누구는 효부가 되고 싶어서 효부가 된 줄 아느냐? 몸서리가 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 안 받고 효부 안 할란다.’ 예레미야도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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