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8장


녹로(轆轤): 오지그릇을 만들 때 모양과 균형을 잡기 위해서 쓰는 물레(고패, 도르레)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면 성전에서 기다리라고 하시지 하필이면 토기장이의 집에서?

    교육적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다: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토기장이의 일과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토기장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마찬가지로 자연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수 많은 열매를 맺는 것에서 예수의 희생을,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에서 새로운 부활의 세상이 있음을. 깡패가 싸우기 전에 사과를 한 손아귀에 넣고 힘을 주어 으깨어 버린다. 공갈이다. 무슨 뜻인가? 꼭 말해야 알아듣나?

    영화 장면에 적합한 음악이나 음향효과를 빼버린 채 메시지만 전달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이런 효과를 감안해야 한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사물에 결부시켜 가르치면 이해하기도, 기억하기도 쉽다. 온갖 기념물을 세우고, 기념일을 제정하신 것과 같은 효과이다.

2. 토기장이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토기장이는 원하는 대로 그릇을 깨고 만든다. 여기서는 완성된 토기를 깨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만들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만드는 경우이다. 이런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진흙의 질이다.

3. 토기장이와 하나님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주권을 가진 점에서는 동일하나 행사 방법이 다르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가지고 원하는 대로 빚는다.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뭉개버리고 다시 빚는다. 하나님도 동일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함부로 뭉개지 않는다. 빨리 처리할 것은 처리하고 만들 것은 만들지 않고? 그렇게 하시지 않는(8)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주권을 가지고 계심에도 인간들의 반응에 맞추어 역사하시니(8, 10) 인간들은 자신의 행위대로 되는 줄 안다. 능력이 있음에도 인간의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에 대한 감사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능력 탓으로 여기니... 하나님께서 부를 얻은 능력을 주셨음을 잊지 마라(신 8:18).

4. 토기장이의 손에 잡힌 진흙이 이스라엘과 다른 점은?

    진흙이야 자기 의사가 없지만 이스라엘은 스스로 선택의 여지가 있다. 깨어질 것인지 예쁜 그릇이 될 것인지.

5.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토기장이의 마음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상태인가?

    깰까 말까: 이런 마음을 안다면 이스라엘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6. 하나님께서 공갈(?)을 쳐도 이스라엘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12). 그러면서도 선지자를 보내서 계속 이런 공갈을 치시는가? 안 들을 줄 알면서...

    포기할 수 없는 사랑: 낳은 죄지머! 이게 얼마만한 사랑인지 알자. ‘셋 하면 쏜다, 하나, 둘, 둘 반, 둘 반하고 반의 반....’ 제발 손 좀 들어달라고 사정하는 것이다, 공갈이 아니고.

7. 설마 자신들의 행위가 악한 줄 알면서(12) 악하게 굴까?

    알고 그런다면 정말 악한 짓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악한 것인 줄 모르는 게 죄다. 큰 죄를 지었다고 잡혀도 ‘그게 관행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정말 몰랐을까? 옳지 않다는 것은 알았겠지만 ‘관행이니까, 모두가 그러니까’ 그러면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떨지를 아는 것이 복이다.

8. 열방 중에 물어보라?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내 백성 이스라엘이 나를 잊고 우상에게 분향하는 것(15): 그거야 흔히 있는 일 아닐까? 우리 생각에는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에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철딱서니 없는 애들하고 싸우려니 어른 속이 다 타는 격일까!

9. 처녀가(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했길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 것으로 점을 찍었다. 하나님 앞에서 점도 티도 없이 순결해야 할 처녀가 어느 놈팽이하고 눈이 맞아서 집을 나가 버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곱게 곱게 키운 딸이 이런다고 생각해보라.

10. ‘레바논의 눈’과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눈 녹은 물)’은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과 대조적인가?

    눈이 녹은 찬물은 마땅히 갈 곳으로 쉬지 않고 흘러간다(=자연의 불변성).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는다(변덕성), 하나님을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였다.

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면 어떤 복을 받게 될까?

    복은커녕 놀랍고 영원한 치소(빈정거리며 웃음)거리가 된다: 조소와 멸시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도 잊어버린 채 출세하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것은 결국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이 황폐화 되었다가 간신히 회복되기를 반복한 것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의 예루살렘도 온갖 세력이 한 부분씩 차지하고 있는 꼴이 누더기 한 가지다.

12. 대체로 새로운 것이 좋다. 집이나 차도 새 것이 좋은데 길은 왜 옛 길이 좋다고 할까? 친구나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다던데 하나님의 말씀도 그런가?

    옛길이란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걷던 길이다. 사 63:11에서 추억하라는 ‘모세의 날’이나 마찬가지다. 렘 6:16에서는 ‘선한 길’이라고 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눅 16:29)에 순종하는 것이 곧 옛길이다. 하나님께서 닦지 않은 길은 길이 아니다. 그것을 새 길이라고?

13. 우리나라에서는 태풍의 피해가 적지 않다. 이스라엘의 동풍은 어떨까?

    이스라엘의 동풍은 아라비아, 즉 남동, 또는 남방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열풍을 가리킨다. 심할 때에는 공중을 사진(沙塵)으로 채워,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외에도, 농작물을 고사케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여호와께서는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여, 바다를 마른땅으로 만드셨다(출 14:21). 요나를 몹시 화나게 한 것도 뜨거운 동풍이었다(욘 4:8).

    이스라엘을 동풍으로 징계하신다는 말은 우리 식으로 한다면 태풍을 불러 징계하겠다는 말과 닮은 점이 많다. 그럴 때는 등을 보이고(=등을 돌리는 게 아니고) 모른 척 하겠다고 하신다.

14. 백성들이 말하기를 예레미야를 쳐도 율법이나, 모략도, 말씀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란다(18). 예레미야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게 아닐까? 잘못 가르친 것 아닐까? 대부분의 목사들도 자신은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는데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둘 중의 하나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했거나 아니면 온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가 없었거나. 안타깝게도 그의 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후자이다. 대다수의 선지자나 제사장들이 하는 말은 틀렸고, 예레미야 혼자 하는 말이 옳았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때에는 어떻게 했어야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15. 예레미야가 무슨 의도로, 무슨 말을 했기에 이렇게 곤욕을 당하는지 자신의 말(19-23)에서 답을 찾아보자.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고,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20).

16.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20a)에서 선과 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20c), 악은 그들이 예레미야를 해하려고 구덩이는 파는 것(20b): 백성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라는 말이다.

17. 아무리 고약한 백성들이기 하지만 그렇다고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일러바치면서 징벌하라고 기도해도 되나(21-22)?

    하나님의 공의로운 간섭 외에는 도무지 방법이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이기도(20) 하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이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았을 때(15:1-2)는 저주라도 요청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간구라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적 선포(1:15-16)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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