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5장


1. 모세와 사무엘은 어떤 일을 했길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해도’라고 하시는 걸까?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적이 있기 때문이다(출 32:11-14, 삼상 7:9).

2. 이스라엘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물으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라고 하신 방법은 몇 가지인가?

    없다: 2절은 그냥 죽으라는 얘기다. 완전히 포기하셨다는 말이다.

3.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말하는 2절과 3절에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

    2절은 ‘다 죽는다’는 뜻이고, 3절은 죽을 자가 ‘철저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칼에 죽은 자를 개가 찢고, 개가 찢은 것을 공중의 새가 먹고 나머지는 땅의 짐승이 먹어치운다.

4. 므낫세는 도대체 어떤 왕이었길래 하나님의 분노가 이렇게 극심한가? 열왕기 21장에서 답을 찾아보자.

    므낫세의 악행 중에서 다른 유다 왕보다 유독 악한 점은 아합 왕의 소위를 본받은 것이다(왕하 21:3). 유다 왕 중에 아합 가문의 아달랴나 아하스(대하 28:2, 열왕기에는 기록이 없음) 외에 바알을 숭배한 왕은 없었다. 므낫세는 여호와의 성전에 바알의 단을 세웠다. 우상을 섬기던 다른 왕들도 다른 곳에 단을 쌓고 우상을 섬겼지 하나님의 전에서 그러지는 않았다(왕하 16:11-14, 아하스가 한 번 그런 짓을 하기는 했지만 므낫세는 더 심했다).

5. 므낫세 다음에 왕이 된 사람은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에 부름을 받아서 사역을 시작했다. 므낫세의 악행을 징벌하려면 므낫세에게 해야지 왜 다른 왕들의 때에 하시나?

    심판을 최대한 늦추시는 이유는 용서할 기회를 주는 것 아닐까? 므낫세의 악행에서 돌아서길 기다렸지만 이 후의 왕들도 회개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제는 중보 기도조차 하지 말라고 하신다.

6.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길 자가 누구며 예루살렘을 위해서 곡할 자가 누구냐(5)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살아남을 자가 전혀 없다: 그래서 안부를 물어볼 수도 없다. 결국 2, 3, 7, 8-9절과 같은 뜻이다.

7.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망하는 것은 대적의 힘이 더 세었기 때문 아닐까?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6, 7 ↔ 사 52:5의 ‘까닭없이’): 병을 치료하는 것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드러나지 않는 원인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대증요법으로 땜질하는 수밖에 없다.

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용서하셨을까? 언제부터 용서하기 시작했는가?

    염증이 나도록(6): 질리도록 용서했다는 말이다. 출애굽 때부터 유다가 망하기까지, 그러면 약 1000년이다. 사사기, 열왕기를 거치면서 배신한 회수를 헤아려 보면 엄청나다. 질릴만도 하다.

9. 키질을 하면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그러면 알곡은 남겠네? 바다 모래보다 많은 과부가 알곡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전체가 쭉정이라는 말이다. 과부가 바다 모래보다 많을 것이란 말은 남았다는 뜻이 아니고 남자들이 전쟁에서 다 죽었다는 말이다. 남자 없는 과부는 희망이 없음을 뜻한다.

10. 대낮에, 졸지에, 놀람과 두려움이 닥친단다(8). 일곱 자녀를 둔 여인에게는 백주에 그의 해가 떨어진단다. 그리고 남은 자는 대적의 칼에 죽는단다(9). 그러면 그 여인의 백주에 떨어진 해는 무엇일까?

    태양같이 믿었던 아들들: 자식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절할만큼 쇠약해졌음에도 남은 아들마저 다 죽는 비극이 닥친다. 일곱 자녀를 낳은 여인이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행복한 여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다.

11. 11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레미야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면 10절은 누구의 말이며 무슨 의미인가?

    예레미야의 하소연이다: 민족의 멸망을 내다보고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에게 사람마다 다툼(시비)을 걸어오고, 때렸다. 빚진 것도 없고 빌려준 것도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저주를 퍼붓는다. 욥이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욥 3:3-10) 거의 흡사하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시고서는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시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프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하나님께서 겪으시기 때문이다.

12. ‘값없이’라는 말은 대체로 좋은 의미로 쓰인다. 13절의 ‘값없이’는 아주 나쁜 뜻이다. 어떤 표현으로 고치면 좋을까?

    ‘무조건’, 혹은 ‘허무하게’: 11절은 선지자 개인에게 향한 위로의 말씀이지만 12-14절은 다시 이스라엘에게 임할 외적의 침입을 말한다.

13.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명을 받은 선지자는 드디어 개인적인 기도를 드린다(15-18).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19-21)은 무엇인가?

    기도의 내용: 나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기도의 응답: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14. 선지자는 하나님께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으므로 기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기뻐하지 않았다. 왜?

    말씀으로 인한 기쁨은 넘치지만(16) 다른 사람만 생각하면 분노가 넘친다(17): 하나님께서 특별한 위로를 주셔도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는, 하나님께 대적하기만 하는 동족들을 보면 분노를 삭일 수가 없다.

15. 선지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기쁨과 동족들이 징계 받을 것을 내다보는 아픔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가?

    건천(18):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란 우기에는 물이 흐르다가도 건기에는 전혀 물이 없는 시내(마른 시내)를 말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쁨이, 동족을 바라보면 분노가! 복음송 Day By Day의 마지막 부분의 가사와 비교해보라,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16.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저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스스로 용기를 내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위대한 사역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답변(19절) 중에서 예레미야의 헌신을 촉구하는 말을 찾아보자.

    돌아오면, 취할 것 같으면, 돌아가지 말지니라: ‘네가 만일 돌아오면’은 예레미야에게 돌아오라는 말씀인가? 언제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떠났던가? 바로 다음 문장이 동일한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해석에 도움이 된다. 아마도 좌절하고 낙담한 상태에서(20:7-9) 다시 힘을 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천한 것’은 낙담하여 하는 선지자의 말, 혹은 백성들의 말이고,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람과 동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도 없다.

17.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로 하여금 놋성벽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앞으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어떤 핍박을 받아도 끄떡 없겠지?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난 핍박을 받으며 고난을 당한다. 결국은 백성들에게 잡혀가다시피 이집트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예레미야의 기도나 하나님의 응답은 예레미야 개인의 안녕과 행복이 아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한 것이다. 사명을 다 하도록 인도해달라는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지키시겠다고 대답하셨다. 물론 이 속에는 예레미야가 갈대아 군대에서 구원받는 것(렘 39, 40장)이나 악한 백성의 손에서 건짐을 받는 경우(렘 37, 38장)도 포함하고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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