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4장


1. 이스라엘의 가뭄과 우리나라의 가뭄을 비교하면 어떨까?

    이스라엘에는 저수지나 강물처럼 저장되는 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시의 적절하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징계가 임할 때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가뭄이 닥친다.

2. ‘성문의 무리’에서 ‘의’는 소유격이 아니라 동격이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성문들’ 즉, 유다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뭄이 전국적으로 닥쳤다는 뜻이다. 수도인 예루살렘조차 부르짖는다면 다른 곳이야 말할 것도 없다.

3. 머리를 가리우며(3, 4)? 이런 경우에 정상적이라면 머리를 가리기보다는?

    떨구고, 혹은 두 손으로 싸매고: 원문상으로는 머리를 가리운다는 표현이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머리를 떨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게 되나? 물을 구하지 못해서 낙담한 모습이다.

4. 가뭄이 임하면 사환들, 농부들, 암사슴들, 나귀들이 고통을 당한다(2-6). 이 표현들이 어떻게 고통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가?

    사환은 심부름이 불가능, 농부는 농사를 포기, 사슴은 새끼를 포기하고, 들 나귀는 자신을 포기해야 할 판이다: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죽음에 직면하겠지만 일단은 이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들 나귀는 갈증이나 굶주림을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짐승이지만 이런 짐승조차 호흡이 가빠지고 눈이 흐려질 정도면 얼마나 극심한 가뭄이겠는가!

5. 7절을 참고하면 가뭄이 드는 것이 선지자에게 책임이 있을까?

    선지자의 탓이 아니라 백성들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자신이 책임감을 느낀다: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내 책임은 아니야’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특별하게 사고를 치거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음에도 ‘내 책임이라’고 나서기가 쉽지 않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이 누구 탓일까? 내 책임은 아니지?

6. 조선시대의 명언에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말이 있다. 죄많은 백성을 위해서 선지자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멋진 말이 있다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7, 21절): 구원의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너무나 가변적이고 변화무쌍한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도 변화무쌍하기 마련이다(취소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이 많을지라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7절).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자이오니 버리지 마옵소서’라는(9)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7.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 곤란한 때의 구원자이시다.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나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과 어떻게 다른가(8)?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나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은 변덕이 심하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놀라 벙벙하는 자나 구원치 못하는 용사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8.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설 때는 언제나 마음을 바꾸시던 하나님께서(창 18장, 출 32장) 예레미야가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신다. 예레미야의 기도가 좀 약했나?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돌이키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회개한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아니 하시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9. 금식하고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인데? 번제나 소제를 드린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인데 왜 이런 것들이 소용이 없을까?

    형식만 남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10. 칼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한데 기근과 염병은 어떻게 발생하는 걸까?

    기근과 염병도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기근이 닥치고 칼에 많은 사람이 죽고 폐허가 되면서 염병이 돈다(18절 참고). 결국은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는 말씀이다.

11.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고 이르지도 않은 말을 전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선지자라고 말할까?

    정확하게 말하면 ‘거짓 선지자’거나 ‘자칭 선지자’다. 그런데도 이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그만큼 엄중할 것을 말함이 아닐까? 구약에서 단 한 군데(슥 13:2)만 제외하고는 이런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가짜 목사라고는 하지 않을 것 같다!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을 끝까지 왕으로 대우하듯이...

12.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고 순종한 백성들은 어떻게 되나?

    마찬가지로 징계를 받는다(16): 심판의 때에는 누구 때문에, 혹은 누가 잘못 가르쳐서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한다. 거짓 선지자의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13. 범죄한 이스라엘을 칼과 기근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후련하실까?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신다(17): 이것은 예레미야가 흘리는 눈물이겠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하다. 징계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니 최후의 수단으로 징계를 하시지만 징계가 최종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다.

14.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정해졌음에도 선지자는 하나님께 뜻을 돌이키기를 간구한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해야 하는가?

    선지자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한국 교회가 이래서 되겠느냐고 한탄하기 전에 깨달은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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