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장


1. 모든 부자가 다 고생이 임하여 슬퍼할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이삭, 다윗, 솔로몬, 욥은 대단한 부자였지만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부자에게만 그럴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서(4. 6), 즐기는 부자들(5): 삯을 제대로 주지 않고 모았고(4), 옳은 자를 정죄하였기 때문이다(6, 정당한 요구를 불법으로 여겼다). 다시 말하면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도하는 자들이 지주를 적으로 간주한 이유도 이들이 소작인의 삯을 갈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이 어떤 비율을 몫을 나누면 되는 걸까? 기업이나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어느 정도가 정당한 것일까? 좋은 부자 되기가 무척 어렵겠다.

2. 부자들의 재물이 썩었고 옷이 좀먹었다는 말은 ‘재물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는 말인데 부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과 정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의 수명이 다를까?

    다르다: 정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은 녹이 쓸지 않고 도적이 들지 않는다(마 6:20).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는 말도 있다. 재벌 2세나 3세가 선친의 기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체로 그런 셈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면 재산을 관리하는 능력도 함께 자란다. 그래야 오래 누릴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3. 금과 은이 녹이 쓴다고? 아닌데?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재물이 사라질 것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재물이 사라지기 시작하면(=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녹 쓸지 않는 것도 녹이 쓴다는 말이다. 부당하게 모은 재물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질 것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4. 이 녹은 무슨 녹이며 무엇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녹(금과 은에 생긴 녹)이 불의한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이다. 그러면 불에 타버리듯이 부자들의 살을 먹어치우리라는 것이다. 부자들에게 심판의 불이 임할 것이라는 말이다.

    녹도 일종의 산화작용이지만 굉장히 느린 속도이다. 그런데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란다(산화작용의 속도가 급격하게 빠른 것이 불이다). 애지중지 하던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며, 자신도 또한 그 불에 살라질 것이다. 재산과 함께 망할 것이라는 말이다.

5. 말세에 재물을 쌓다니? 구체적으로 무슨 잘못인가?

    때를 잘못 택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짓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잔뜩 쌓아두었는데 내일이 종말이라면 결과가 너무나 허무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4:13). 내일이 도살의 날인줄 모르고 오늘 부지런히 먹고 살을 찌운다면 얼마나 불쌍한 일이냐? 결국 비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런 허무함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6. 추수한 자들이 왜 우는가?

    부자들이 추수한 자들의 품삯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적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항의를 아마도 부당한 방법으로 정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6). 억울하지만 법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7. 품꾼들을 울리면서 모은 재산으로 사치하고 연락(宴樂)하면 어떤 벌을 받을까?

    도살(5): 가난한 자들을 울리면서 모은 재산으로 사치하고 연락하는 것(원어상으로는 ‘음탕하게 살다’)은 도살하기 위한 짐승을 살찌우는 것처럼 스스로를 살찌우는 일이다. 누구 좋으라고? 여기서 사치와 연락은 방탕한 삶을 가리키는 말이다.

8.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한 형제들이 인내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강림이 가깝기 때문이다: 부당한 부자들의 잘못을 곧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믿고 견뎌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까운 장래의 일인지 몰라도 우리가 보기에는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자(아래 질문을 참조)!

9. 누구처럼 인내해야 하는지 세 가지를 예를 든다면? 또, 이들처럼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부처럼, 선지자들처럼, 욥처럼: 인내하면 열매를 맺을 때가 있다(농부), 그 때까지 어려움도 있을 수 있다(선지자들, 욥), 결국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욥)는 말이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농부처럼 때를 기다리며, 주실 상급을 기대하며 (원망하지 말고) 참으라는 말이다. 빨리 끝장을 내지 않고 왜 이렇게 더디나?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탓이니 이해하렴(11)! 그렇게 기다리는 바람에 성도들이 고난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얼마나 더 많은가!

10. 이른 비는 10, 11월에 오는 것이고, 늦은 비는 4, 5월에 오는 비이다. 이름이 거꾸로 붙은 것 아닌가?

    10, 11월이 파종기이고, 3, 4월이 결실기이기 때문이다. 지중해성 기후가 우리와 반대현상을 보인다던가?

11. 서로 원망하는 것이 심판을 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다: 인내하고 기다려야할 때 주의해야하는 것이 형제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을 형제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원망한다는 것은 스스로 판단했다는 뜻이며, 그런 판단은 심판자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다. 심판자가 계심을 믿고 그 분에게 맡기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이 손을 대지 않았던 다윗이 좋은 예이다.

12. ‘맹세하지 말라’는 것과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같은 표현이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함부로 맹세하여 지키지도 못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이다. 예,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라는 것은 거짓 맹세로 얼버무리지 말고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셈이다.

13.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없을까?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김이 되기 때문에 맹세를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늘이나 땅으로 맹세하는 것은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단다. 하나님은 두렵지만 하늘이나 땅이야... 맹세의 대상에 따라 등급이 달랐다(마 23:16-18).

14.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고, 병든 자는 장로들을 청하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행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원인자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바탕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 때문에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선조들이 항상 기억하던 말 Coram Deo(하나님 앞에서)!

    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즐거울 때 찬송하는 것 아닐까? 제 잘난 탓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15.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는 말은 병들면 병원에 갈 생각하지 말고 장로들을 청하든지, 아니면 영험한 기도원으로 가라는 말인가?

    기름을 바르며(약을 쓰라는 뜻이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약이나 의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약이나 의술을 의지하지 않고 무조건 기도만 하는 것이 더 신앙적인 것은 아니다.

16.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어떤 결과를 얻는가?

    육체는 물론이고 영혼을 구원하게 한다: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결과적으로 영혼을 구원하게 된다(15).

17. 죄를 서로 고하며? 고해성사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을까? 초대 교회와 같은 부흥의 역사에는 죄를 공중 앞에서 자복하는 회개의 영이 임하셨다.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시는데도 문제가 있더란다. 공중 앞에서 고백해서는 안 되는 죄는 어떤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죄 고백을 자제해야 한다. 가령, 간음죄 같은 경우는 상대방이나 가족들에게 치명타가 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죄는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한다.

18.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말은 자기가 기도하기보다는 꼭 목사님의 기도를 받거나 은사받은 분에게 기도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인가? 그런 의인의 예로 든 사람이 누구인가?

    아니다. 예로 든 의인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 그런 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믿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누구라도 진실되고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말이다. 엘리야가 그런 의인이라고 예를 든 것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즉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여 응답받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19. 왕상 18:1에 ‘제 3년에’라는 표현이 있다. 비가 오지 않은 기간이 3년인가, 3년 반인가?

    왕상 17장의 전체 내용이 3년 반에 걸친 것이라고 보면 된다(눅 4:25).

20. 왕상 18:1, 42-45절을 읽고 엘리야의 기도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간절히 기도함: 엘리야의 간절함만 배워서는 안된다. 아무리 간절해도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제단에 불을 내려달라는 기도는 아주 간단하다. 간절함이 기도가 응답되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고보가 간절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믿음의 기도’ ‘의인의 간구’이다.

21. 진리를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거나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는다. 당연한 말 아닌가?

    영혼을 구하는 것이나 죄를 덮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게 놀라운 일을 ‘네가 했다’고 하실 거라는 말이다. 단 12:3(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에서 약속한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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