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장


1.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자신의 실패한 경험 때문: 예수를 육신의 형님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가(=예수님을 외모로 취한 것) 나중에 보니까 영광의 주이심을 알았기 때문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 분이 실제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셨음을 믿는 우리가 겉보기에 약하고 무능하다고 경시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8-9절이 정답이므로 이런 설명은 썩 좋은 답은 아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한 성경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율법을 따르는 자들보다 더 잘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성도들이 주께서 가장 소중하다고 말씀하신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느냐?

2.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원어상 2절 서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믿음: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으니 이제 이렇게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십계명의 서문을 연상시킨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해내어 자녀로 삼았으니(십계명의 서문) 계명을 지켜라고 하셨다. 십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믿음 때문이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했다고 해서 믿음을 경시하거나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오해이다.

3. 야고보서를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는 근거가 있다면?

    회당(쉬나고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유대인들과 완전히 결별한 상태는 아니었다. 유대교의 일파 정도로 생각했었다.

4.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예배드리는 곳에 함께 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2-4)?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구별(=차별)하지 말라(4): 이것이 곧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5. 금가락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고 오는 성도를 좋은 자리에 앉히는 것이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라면 어디에 앉혀야 하나? 발등상 아래 자리에 앉혀버려?

    그것도 차별이다. 역차별도 차별이니까: 모두를 다 좋은 자리에 앉히면 된다. 좋은 자리가 부족하면 귀하게 여기면 된다. 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없이 모두 귀하게 대하라는 말이다.

6. 부자와 가난한 사람 중에 교회는 누구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할까(5)?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더 관심을 가지셨음으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5):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가난한 자들이었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였다.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가 말이다.

    기본적으로는 구별없이 동등하게 취급해야 하지만 똑 같이 대우하는 것이 반드시 평등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똑같은 벌금을 선고한다고 해서 평등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더 가혹한 징계가 된다. 가난한 자는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교회가 재물에 더 관심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난한 자를 더 돌보아야 한다. 교회가 영혼보다 재물에 더 관심이 있으면 타락했다는 증거다. 책이나 옷을 무게로 파는 것과 비교해보자. 심혈을 기울인 책을 무게로만 따진다면? 어떤 저자는 자신의 책이 하류 연애소설과 비교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외모로? 이것은 악한 생각이다(4). 대접하거나 영접하는 면에서는 구별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어야 한다.

7. 이 부자는 누구이길래 그리스도인들을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며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이 돈의 위력으로 여러분들을 괴롭혔음에도 여러분들이 돈 문제로 형제를 멸시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 당시에 돈과 권력을 지닌 자들은 소위 사두개인들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핍박을 받고도 돈 문제로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돈 문제를 깨끗이 초월해야 핍박한 자들에게 당당한 것 아니냐?

    부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돈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대체로 그런 것이다. 부자는 돈의 위력으로 그렇게 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가난하면 화해할 일도 부자는 자신이 가진 부를 과시하고 싶다.

8.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어떻게 최고한 법(왕의 법)인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레 19:18의 인용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온 율법(모세 오경)과 선지자(선지서)의 대강령이라고 하셨으니 (마 22:39 법 중의 법이라고 할만하지 않은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바로 이 말씀을 위배하는 것 아니냐(9)? 이 말씀이 율법의 최고한 법인데 이것을 어겼으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9. 율법을 다 지키다가 겨우 하나 어기면 100점은 아니라도 90점은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과 관계된 율법을 다 지키고, 사람들과 관련된 중요한 것 다 지키고, 가난한 자를 조금 차별했을 뿐이라면 97점은 될텐데...

    율법을 자기편의대로 함부로 해석하거나 가감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는 율법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지녔다고 지적하는 셈이다.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중요하다(마 5:18). 마음대로 가감해서는 안된다(신 4:2, 12:32, 계 22:18-19). 그런데 제 멋대로 하나를 뺐다는 것은 율법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며 율법 전체를 무시한 것이다. 율법은 그렇게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율법 전체를 가볍게 보는 것이며 동시에 율법을 주신 분을 가볍게 여기는 셈이다.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실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이런 사람은 율법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졌으므로).

    길게 설명할 것 없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율법의 대강령이라’고 하셨는데 가난한 형제를 차별했다면 율법을 다 어긴 자다.

10. 자유의 율법이 무엇인가?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다고 하던데 왜 심판 받을 자처럼 행하라고 하는가?

    자유를 주는 율법이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하는 예수의 복음이다(요 8:32). 그리스도인들은 이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심판받을 자처럼’이라는 말은 심판이 없지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심판 때문에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속박)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기쁨(자유) 때문에 기꺼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부른다.

11.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주기도문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심판이 없는 게 아니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큰일 났네! 두 말씀의 핵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풀고, 죄를 용서하라는 말이다. 예수 믿는 자를 심판을 하거나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긍휼을 행하라고 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긍휼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려는 마음도 없는 사람은 심판의 대상자이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용서해주어야 하는데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12.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롬 5:1)고 말할 때의 믿음과 14절의 믿음은 다른가?

    14절의 믿음은 ‘자칭 믿음’이다(←믿음이 있노라 하고):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24절의 믿음도). 자칭 위인을 영어로 a big noise(소음)라고 한다. 자칭 위인은 위인이 아니다. 같은 방식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17) 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악용하여 행하지 않는 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13.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에게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밥 먹어)’고 하는 것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못 하다. 가령, ‘옛날에 우리는 밥도 못 먹었다’고 하자 아이들이 ‘밥이 없으면 라면이나 빵이라도 먹지?’ 한다. 이런 대답은 소용없는 정도를 넘어서 철없는 말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것보다 더 나쁘다. 도와줄 능력을 가지고도 도우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행위로 구원을 받느냐?’고 논쟁을 하는 것은 야고보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14. ‘행함이 없는(=행함과 분리된) 믿음이란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면, 믿는다고 고백을 하면 믿음대로 행할 능력이 바로 생기는가?

    최소한 행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능력이 부족해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차츰차츰 나아질 것이지만 최소한 행하려는 의도나 노력은 있어야 옳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는 데에서(21) 해답을 찾아야한다.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믿고 행하기까지 오랜 훈련의 기간이 필요했다.

15. 귀신들의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관계인가?

    같은 것이다: 이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일 뿐이다. 단순하게 아는 것이다. 아무런 개인적인 교제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일뿐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친밀한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것처럼(23, 대하 20:7, 사 41:8). 그런 관계없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행이다. 하나님이 두려울 뿐이다.

16.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하면서 예를 든 것이 이삭을 제단에 드린 사건이다. 행함이 부족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

    아브라함의 말년에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이렇게 행함으로 가득찬 삶은 아니었다. 오래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결국에는(마지막에) 그렇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17. 누군가가 말했다, ‘믿음이란 외줄타기 선수의 등에 올라서 함께 외줄을 타는 것’이라고. 정말 그 정도는 돼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대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복음 전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오순절 사건 이후부터일까?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3년 동안은 전혀 믿음이 없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리기 이전에는 믿음이 어땠을까? 부인을 누이라고 말할 때는?

    여린 믿음도 있고 강한 믿음도 있는 것이지 믿음이 행위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해도 믿음이 다 같은 모양은 아니다.

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신 때(창 15:6, 16:3)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린 것(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다(적어도 30년). 그 사이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건도 있다.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함께 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이것을 야고보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믿음이 먼저고 행함이 후에 응하였다(23): 아브라함에게 믿음과 행함이 함께 한(행함으로 의롭게 된) 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지 대략 30년 후이다(아브라함이 85세에 하갈을 취하였고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14년 후에 이삭이 태어나고, 짐을 져 나를 정도로 자랐을 때). 믿음이 자람에 따라 행함도 그렇게 자라간다. 반면에 우리는 출발점부터 믿음에 관한한 어른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이 글의 대상이 바로 이미 믿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9. 담배나 술 때문에 교회 출석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술 마시면서, 담배 피우면서 교회에 나오세요, 술이나 담배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더니 그 말을 들은 장로가 그 날부터 술, 담배를 시작했다고 치자. 이건 치리감이다. 이 말이 믿음과 행위에 대한 논쟁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초신자에게 주는 메시지를 기존의 신자가 듣고 자신에게 적용하면 안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초신자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출발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기존 신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여기서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말로만 믿노라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니라’는 의미이다.

20. 기생 라합이 정말 행함으로 구원을 얻은 것일까? 성경이 그렇다고 말하는데 무슨 이의를 다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좀 더 정밀하게 살펴보자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백성들을 배신하고 정탐꾼을 숨겨주었다. 두려움 때문에, 다시 말하면 단순하게 살아남기 위한 이런 노력도 ‘행함을 수반한 믿음’이라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21. 정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염두에 둔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믿음 없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포함)이지만, 야고보는 믿음을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썼다.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초신자에게 관심을 두었고 야고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표현의 차이가 있을뿐이다. 바울은 회심에 대해서, 야고보는 성숙에 대해서, 바울은 믿음의 뿌리에 대해서,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천국가고 행함으로 상급을 받는다고 한다.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점은 있는 셈이다. 믿는데 왜 행동이 따라주지 않느냐면서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믿는다고 바로 행동이 따라오지 않는다.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22. 한 단어가 반드시 하나의 사물이나 개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완전히 반대인 경우도 많다. 가령, ‘그 친구 영 못 쓰겠더군’ 이 문장의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친구’가 아니다. 친구가 아닌데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 셈이다. 본문의 믿음이란 단어도 이와 같이 쓰였다. 크게 둘로 나누면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함께 하는 믿음’이다. 14-26절에 사용된 믿음이란 단어를 다음과 같이 6가지로 더 세분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 14 / 17, 18, 20, 24 / 19 / 18b, 22 / 23 / 26 >

    자칭 믿음(14), 행함이 없는 믿음(17, 18, 20, 24),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믿음(19), 행함이 따르는 믿음(18b, 22), 초보적인 믿음(23), 죽은 믿음(26): 위의 예에서 친구가 아닌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듯 믿음이 아닌 것을 편의상, 혹은 외형상 믿음이라고 말할 뿐이다. 행함이 따르는 믿음과 초보적인 믿음이 믿음이다. 편의상 초보적인 믿음이라고 했지만 성경은 이런 믿음도 분명히 믿음이라고 인정한다(가령, 출애굽기 3, 4장에서 순종하지 않는 모세처럼). 마치 어린 아이라도 완전한 인간인 것처럼.

    다른 예로서 바울의 행함은 구원의 전제조건으로서 행함이고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구원받은 자의 열매로서 행함이다. 같은 단어 ‘행함’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것이 우리가 쓰는 언어의 한계성이다. 언어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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