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6장


1.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냐?’는 것은 짓지 말라는 얘긴가? 지으란 얘긴가? 전에 누가 이런 말을 하나님께 한 적이 있는데(왕상 8:27)? 1) 후일 어떤 일에 대한 대답이 되겠는가? 2) 이 말과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애통하는 자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1) 성전 건물에 그렇게 집착하지 말라(성전 건물의 무용성): 후일에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될 때 ‘왜 성전이 파괴되도록 버려두셨느냐?’고 묻지 말라는 셈이다. 솔로몬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2)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보다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애통하는 것이 먼저다. 가난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만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 성전인데 엉뚱한 자들이 와서 설치고 있으니 그게 무슨 성전이냐는 말씀이시다.

2.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자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두려워 떠는 자’이다(2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자는 어떤 자인지 3절을 2절과 대조시켜 요약해보자.

    하나님 섬기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 없는 자,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 섬기는 자, 내용은 없이 형식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 첫 표현이 가장 좋아 보인다.

3.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피비린내가 난다(=살인함)’고 하셨다. 전에는 ‘향기롭다’고 하셨는데(레 1:9, 13, 17) 입맛이 변하셨나?

    본래부터 하나님께서는 제물 자체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제물처럼 드려지는 사람의 애통하는 마음을 향기롭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 애통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그저 형식적으로 짐승만 잡고 있으니 싫은 것이다.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소나 양은 개(더러움과 경멸의 대상, 신 23:18, 삼상 17:43)나 돼지(부정한 짐승, 레 11:7)와 마찬가지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경배를 드렸다. 문제는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이 하였다는 점이다(3). 도대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어야 한다. 자기 방식이나 자기 생각대로(3절의 자기의 길)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가증한 것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2b, 5a). 형식보다 마음이 우선이다. 반면에 우상이야 일정한 형식만 갖추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느라고 섬기는 것이었다.

5. 불러도 대답이 없다고 불평한 것은 이스라엘이었는데(58장)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서로 길이 어긋났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우상에게 드렸다. 그러니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지지 않았고,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음성은 귀를 하나님께 향하지 않아도 그냥 들리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방법이 그렇지 않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께로 귀를 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6. 예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을 때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마 27:49) 고 말했던 사람과 똑 같은 사람들이 본문에 있다면?

    5절에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너희 형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며 성도를 비난하는 이런 자들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마 10:22, 요 16:2). 복음이 전해지는 곳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답변은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는 것이다.

7. 시온의 회복을 무엇이 비유하고 있는가?

    이상한 해산,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 연한 풀의 무성함:

8. 로마는 하루 밤에 세워지지 않았다. 로마인들에게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하루 만에 시온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 뭐라고 할까?

    어찌 이런 일이?(8):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뜻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퍼져나가는 모습도 꼭 이와 같다.

9. 시온의 회복을 ‘해산’에 비유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3가지)?

    시온의 회복이 빠를 것(특이한 해산이 의미하는 것)과 반드시 되어질 것(9)과 기쁠 것(10-14).

10. 10~14에 따르면 하나님은 (      )이시다.

    어머니: 흔히 하나님을 근엄하시기만한 아버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했던 바리새인들이 여기 이 표현을 보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시라? 그나마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가르치시고 부르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11. 15-16에 따르면 하나님은 (     )이시다. 위의 질문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다른가?

    전사(戰士): 자기 백성에게는 어머니같이 자애로우시지만 대적들에게는 불과 칼로 심판을 행하신다. 어쩔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이런 양면성(사랑과 공의)이 있다.

12. 애기가 젖을 배부르게 빨면 어떻게 되나?

    자거나 놀지(엄마의 무릎에서): 젖을 넉넉히 빤 아이가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랴! 예루살렘에 슬픔이 닥치기도 하겠지만 때가 되면 이처럼 시온은 강같이 흐르는 평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누릴 행복이 바로 이것이다.

13. 연한 풀이 자라날 때는 무섭게 자라난다. 뼈가 그렇게 무성하다는 것을 마른 뼈와 대조적인 의미로 생각하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진노로 마른 뼈같이 되었던 이스라엘이 왕성하게 생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14.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을만한 짓을 한다.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무얼 하나?

    동산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목상의 뒤에서=우상) 돼지고기와 쥐를 먹는다. 돼지는 물론 쥐도 부정한 동물이다(레 11:29).

15. 18절 앞의 ‘그들’은 누구일까?

    15~17절서 심판당하는 자들: 18절의 절 매김이 잘못이다. ‘18절上’은 17절에 연결시키고 ‘18절下’는 19절과 관련된다.

16. ‘때가 되면 열방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고 다시 먼 곳으로 보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파할 것,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을 것이라’는 말에 제목을 붙인다면?

    이방인을 통한 이방인 선교

17. 이방인들이 무슨 예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가(20절)?

    너희 모든 형제들(온 세상에 흩어진 이스라엘): 이방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찾아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듯 바친다는 것은 신약시대에 온 세상으로부터 이방인들이 영적 예루살렘, 곧 교회로 나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직접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라는 뜻으로 쓰였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제사장과 레위인, 즉 예배자를 세우신다.

18.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보고도 절망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으로 인한 심판조차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끝인가?

    예루살렘의 회복(20), 예배의 회복(23):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지닌 가장 큰 의미가 바로 예배의 회복일 것이다.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이 사라진다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날 시대가 있기에 선지자는 최악의 상황을 보면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19. 선지자는 메시지를 마무리 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심판을 반복해서 외친다.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지 정리해보자.

    4번 < 1-2 ↔ 3-4 / 5 ↔ 6 / 7-14 ↔ 15-17(18a) / 18b-21(23) ↔ 24 > 이사야 전체 줄거리가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회복의 반복이다. 이제 마무리하면서 핵심을 거듭 거듭 당부하는 셈이다. 그에 알맞은 표어가 있다면 14절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그의 진노는 그 원수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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