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5장


1. 구하지 않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돌이켰다는 뜻인가?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들켜주었다는 말인가? (참고 롬 10:20-21)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타내셨다는 뜻이다. 세 번째 표현의 ‘여기 있노라’고 하였다는 말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세 번의 표현은 동일한 내용의 반복이다. 첫 번째의 ‘물음을 받았음’이라는 말의 원어는 ‘찾아지도록 허용하였으며’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아무리 경고하고 징계를 해도 안 되니 결국은 하나님께서 ‘구하지 아니하던 자’, ‘찾지 아니하던 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나라’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다. 신약에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주어진 선물이다.

2. 하나님께서 손을 펴서 누구를 기다리고 계시는가?

    패역한 백성들, 항상 노를 일으키는 백성들: 재산을 들고 나가서 다 날리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눅 15)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3. 이스라엘이 어떤 점에서 가장 가증스러운가?

    패역을 행하면서도(4절) 자신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점(5절): 술 취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패역한 짓을 행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는 것은 아마도 죽은 자와 교제를 나누는 영매술이나 죽은 자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돼지고기는 이스라엘에게 가증한 것인데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버린 셈이다. 후일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이스라엘에게 배교를 강요할 때 돼지고기를 먹게 한 것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이스라엘의 패역이 심각한가!

4. 이스라엘의 패역을 설명하는 구절(3절)에서 밑줄 친 부분을 (      ) 안에 제시한 구절과 비교해보라.
「곧 동산에서 (↔ 신 12:10-11)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 출 20:25)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 사 65:2)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후일의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섬겨야 했고, 다듬은 돌이 아닌 자연석이어야 했다. 아마도 형상을 새기는 일을 금하신 것 같은데 이스라엘이 굳이 벽돌을 사용한 것은 모양이나 미신적인 모양을 새기던 이방인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일 자기 백성을 기다시는데 이 백성은 항상 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5. 이스라엘의 패역함은 마치 코에 들어가는 연기와 같단다. 코에 연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

    못 견딘다: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을 정도로 패역하다는 뜻이다. 코를 가리키는 단어는 ‘분노’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읽으면 이스라엘은 분노의 연기, 종일 타는 불에 태워질 수밖에 없다.

6.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백성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라더니 무엇을 하시는가?

    보응: 하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던 다른 사람(이방인)에게 나타나시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버린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행한 죄악의 보응을 받을 뿐 아니라 조상 때부터 이어온 죄악을 감당해야 한다.

7. 사도 바울은 롬 9-11장에서 ‘이스라엘은 완악하여 넘어졌고 구원은 이방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보응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데도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이 옳은가?

    8-10절은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징계하는 와중에서도 ‘씨를 내며’ ‘택한 자가 기업을 얻을 것’이며 ‘나를 찾는 자가 기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롬 11장과 맥락이 같다.

8. 9-10절의 내용을 근거로 8절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8절은 농부의 어떤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버릴 수밖에 없는 포도송이들 중에도 즙을 짤만한 것이 있어서 일부를 가려내는 행위: 농부들이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다 멸하지 않고 일부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어가신다.

9. 65:1-12절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롬 9-11장과 동일한 내용이라면 ‘여호와를 버리고 갓(운수신, 행운의 신)에게 상을 베풀고 므니(운명의 신)에게 섞은 술(칵테일? 폭탄주?)을 가득 붓는 자들은 칼에 살육을 당할 것이다’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가?

    예루살렘 멸망: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복음이 이방인을 향할 때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엄청난 살육이 저질러지고 처절하게 무너지고 만다.

10. 두 종류의 인간으로 극명하게 갈라진다(13-14). 먹어 배부른 자와 굶주린 자, 마시는 자와 갈한 자, 기뻐하는 자와 수치를 당하는 자, 노래하는 자와 우는 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하나님을 찾는 자(10)와 하나님을 버린 자(11)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느 시대를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7-25절을 참고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론적 상황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좋겠다.

11. 마 8:12절,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과 마 24:40-41절,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본문과 관련지어 보라.

    동일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본문이 종말의 상황에 대한 묘사라고 볼 수 있다.

12. 두 종류의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름이 다르다. 여호와를 버린 자의 이름은 저주용으로 쓰일 것이고 택한 자들에게는 다른 이름, 아마도 영광스런 이름(가령, 성도)이 주어질 것이다. 이름이 저주용으로 쓰인 경우는 여로보암과, 바아사(왕하 9:9), 시드기야와 아합(렘 29:22)이 있다. ‘너희 집안이 여로보암 같기를 원하노라’ 이거야말로 끔찍한 저주다(왕상 14:7-13). 그들의 이름이 저주용으로 쓰일만큼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라는 선고이다. 지나간 시절에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생각해보라.

13.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자들은 복을 구하든, 맹세를 하든 진리의 하나님께 할 것이다(16절). 이 말은 역설적으로 어떤 시대가 되었음을 말하는가?

    더 이상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우상에게 맹세하고 복을 빌므로 겪어야 했던) 환난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16절부터 새로운 단락으로, 번역도 조금 달라져야한다.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마다 진리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구할 것이요 맹세하는 자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이전 환난이... (17절) 왜냐하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14.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는 것은 재창조다. 첫 창조와 비교하면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의 관심이 천지만물에 있다기보다는 자기 백성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다. 첫 장조에서 아담으로 말미암은 저주가 거의 사라지고 기쁨이 넘친다.

15.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집을 짓고 거하는 것과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참고 신 20:5-6, 28:30)?

    전쟁(23절의 재난)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오래 산다는 것도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전쟁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전쟁은 빼앗기 위함인데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란? 25절이 그 해답이 되는 것 같은데...

16.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않겠고’(23절)에서 ‘생산한 것’은 농작물이 아니라 자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무슨 뜻이 되는가?

    아기를 낳아도 사산이나 조산 없이 잘 자란다. 바로 앞의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도 같은 의미이다. 1년이나 고생해서 낳은 아이가 죽는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17. 여기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국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오래 살기는 살지만 여전히 죽음이 존재하는 곳이다. 현세의 삶의 연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전쟁이나 질병이 없는 세상이다(21-23).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것이나 짐승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계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과는 좀 다르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전에 범죄로 말미암은 저주가 사라진 세상이다. 아마도 이 세상이 계시록이 말하는 천년왕국인가?

18. 새 하늘과 새 땅의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가 있는 것(24): 물질이나 수명에 관한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부르기 전에 응답하신다. 그렇게 되면 부를 필요도 없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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