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3:7~64장


1. 본문은 근사한 기도이긴 하지만 문제가 많아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을(기도를) 하면서:
1)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거나 회개하는 내용은 몇 절인가?
2) 하나님께서 징계하셨다는 내용은 얼마나 있는가?
3)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위대한 역사를 다시 한번 이루시옵소서라는 내용은 얼마나 되는가?

    1) 64:5, 6(두 절): 10a는 회개라기보다는 과거의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뿐이다.
    2) 10b, 18-19, 64:5, 6, 7, 10, 11 (일곱 절 반):
    3) 7-9, 11, 12-13, 14, 15, 16-17, 64:1-2, 3-4, 9, 12 (열 여섯 절): 자신들이 회개하는 기도라기보다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왜 우리를 이렇게 버리셨느냐? 다시 한번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옵소서! 하나님의 행동을 촉구하는 기도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자신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이러니 이런 기도의 응답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65:1-7). 이런 이유로 본문을 이사야의 기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기도나 생각을 이사야가 인용하며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7~14절은 기도인가? 찬양인가? 아니면?

    구원 역사에 대한 회고: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평안을 주셨다. 징계 가운데서도 돌이켰을 때 구원을 베푸셨다’는 회고이다.

3.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제 멋대로 저주하거나 함부로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으로 기억한다. 명백하게 구약을 잘못 읽은 탓이다. 이스라엘은 여기서(특히 7-9절)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은총을 베푸시는 자(7): 어쩔 수 없어서 심판하시기도 하지만 ‘자비, 긍휼, 구원, 사랑, 구속, 드시고 안으심’ 이런 단어들이 어울리는 분이시다.

4.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는 말은 누가 하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스라엘이 말함: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면 좋겠는데 꼭 사고치고 아쉬울 때 이런 소리하는 것은 어딘가 아쉬움을 준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5. 9절의 원문에는 부정어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예를 들면, 로암미의 ‘로’처럼)가 하나 들어있는데 전통적인 히브리인들의 독법에 따라(Qere, not Kethib) 많은 번역본들이 부정의 의미를 살리지 않는다. 굳이 살린다면 9절의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 좋을까?

    그들을 구원하시며: 이 말을 부정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로 구원하시지 않고 친히 구원하셨다’는 뜻이 된다. 한글의 몇 가지 번역이 다른 이유이다.

6. 어려운 시절에는 과거의 좋았던 시절이 그리운 법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모세의 인도함을 받아서 애굽을 나올 때가 정말 좋았던 시절이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11-14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어디 계시나이까?

7. 예전에 좋았던 시절의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은?

    광야의 말(13), 골짜기의 가축(14): 광야를 달리는 말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산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이상적인 광경이다. 물이 흐르는 계곡의 가축은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외적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다.

8. 하나님을 향한 애절한 기도가 시작되는데(15절) 대단히 현학적이고 화려한 수사법이 동원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빠졌다.

    회개가 없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지적이 없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울부짖을 뿐이다.

9.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다.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야곱이 이스라엘을 잊을 수 있는가!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어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어떤 말씀이 이와 비슷한가?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훌륭한 고백이다.

10.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결단코 잊지 않았사오니 돌아오시옵소서(17절)? 뭔가 이상하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원인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들에게 있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다.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이나 경외하지 않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시다? 화려하고 유창한 언변으로 기도를 시작하였으나 내용에는 문제가 있다. 양복에 고무신처럼!

11. 18절의 ‘땅을’은 작은 글씨체로 쓰여 있다. 원문에는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잠시 차지한 것이 주의 성소인지 가나안 땅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부분(16-19절)의 핵심은 ‘거룩한 백성이 이렇게 험한 몰골로 살아서 되겠습니까?’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떡하라는 건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시옵소서(64:1-2).

[ 64장 ]

12. 하나님께서 무엇을 ‘불이 섶을 사름같이, 불이 물을 끓임같이’ 하시라는 말인가?

    산들(1절): 하나님께서, 산이 진동하고 불이 붙고 용암이 녹아 흐르는 장엄한 모습으로 강림하시라는 것이다. 마치 화산이 분출하는 모습을 염두에 둔 것 같다.

13. 이 기도(1-4)를 우리가 흔히 하는 기도와 비교해보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 맞춘 개인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반하여 본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화려하고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말로 표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신 이유를 알지 못하면 헛일이다. 차린 모양은 진수성찬인데 실제로 먹을 것은 별로 없는 상과 같다. 문장은 화려한데 알맹이가 없다.

14.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땅을 진동시키는 일을 하라는 말인가(1-2), 하셨다는 말인가(3-4)?

    시내산에서 보았던 영광스러운 모습을 한번 더 보여달라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던 모습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일은 이스라엘이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 아니라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15.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신들의 오랜 범죄(5): 그러면 회개하는 셈이네? 이 부분에서 잠간 자신들의 죄악을 언급한다. 그나마 다행인데 이내 다른 소리를 한다(7절).

16.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고 주를 붙잡는 자도 없는(7절) 이유는 무엇인가?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다(7): 곧 죽어도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 자신들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옳은데... 자신들의 의는 더러운 옷 같고, 쉽게 마르는 잎사귀와 같다(6)는 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고백 같은데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다니...

17. 여호와는 우리 아버지시고, 토기장이시고, 우리를 지으신 자이시다(8).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이대로 두고 보시겠나이까? 주의 백성이 이렇게 처참한 꼴을 하고 있는데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내는 데에 적합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자’라는 의미로 쓰였다. 문맥에 적절하지 못한 표현 같다. 주의 거룩한 성읍, 시온이, 예루살렘이 성전이 불에 탔고 황무하였으니 이대로 두고 보시겠나이까? 이스라엘의 애절한 마음은 알겠는데 문제는 왜 그렇게 되었느냐에 대한 반성이나 회개가 없다. 이스라엘의 기도가 그럴듯하다가도 어딘가에 허점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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