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2~63:6장


1. 62장은 60장과 내용이 거의 같다. 두 장 모두 회복된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주된 내용인데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대체로 60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62장은 예루살렘 성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용은 동일한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중간에 든 61장은 이 회복의 기초가 되는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2. ‘나’는 누구일까?

    이사야로 보는 견해와 이 일을 이루시는 메시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루어질 사역 자체가 메시야적인 사역임을 감안하면 후자가 옳아 보인다. 60장에서 같은 내용을 메시야가 말하였던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설령, 이사야로 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이사야의 메시지라기보다는 메시야의 메시지이므로 결국은 동일하다.

3. 시온에서 빛이 나고 횃불이 나타나면 누가 득을 보는가?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에게도 구원이 전파되리라는 선언인 셈이다(2).

4. 회복된 이스라엘에게 왜 새 이름이 필요할까?

    엄청난 변화(신분, 성격, 본질에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3): 신분이 달라지면 그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다. 교황이나, 고대의 왕이 즉위하면 이름을 새로 붙였던 것과 비교하면 되겠다. 특별한 물건에는 사람처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예, Big Ben).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도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의 홍수는 말이 홍수이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그에 알맞은 단어가 없는 탓에 이름을 제대로 붙이지 못해서 당시 심판의 심각성과 끔찍함이 바르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다. 홍수가 아니라 가장 끔찍한 재앙이라고 해도 표현이 부족하다. 이름을 제대로 붙이지 못해서 생기는 애로 사항이다.

5. 예루살렘의 본 이름은 ‘버리운 자’ ‘황무지(버려진 땅)’이었다. 바뀐 이름과 비교해보자.

    헵시바, 쁄라: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이고, 쁄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이다(재혼을 가리키는 말). 실연을 당하거나 이혼 당한 것과 같은 이스라엘이 다시 애인이 되고 결혼하게 될 것이다. 기뻐할 건덕지가 별로 없는 곳이 황무지인데 이 곳에 다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는 것과 동일한 이미지이다.

6.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혼 당한 여인이 다시 남편과 결합하는 것에 비유되었다(4, 호 3:1-5). 그런데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과 같다고 하면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데 무슨 의도일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겠다는데...: 이스라엘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7. 5절의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는 직역하면 ‘네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겠고’이지만 ‘네 아들들이 네게 거하겠고’도 가능하다. 각설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결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쁨: 그렇게 기쁜가? 어쨌거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신랑과 신부 사이에 있는 모양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다.

8. 파숫군은 조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군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들은 숨소리도 못 내고, 방구는 물론 기침도 참아야 하는데?

    그런 보초도 있지만 시끄럽게 구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는 야경꾼이 야간에 순찰을 돌면서 짝짝이 비슷한 걸로 ‘딱딱’ 소리를 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아마 그런 류의 보초이었을 것이다. 예방이 주목적인 경우에는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야 한다. 자동차의 과속을 막기 위해서 숨어서 사진을 찍는 경우와 미리 예고하고 찍는 경우를 비교해보라.

9. 쉬지 않고 계속 떠들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파수꾼과 종교 지도자들: 6절의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여호와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란 뜻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주께서 하신 약속을 늘 상기시켜 드려야할 너희’라고 번역하였다.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에 세우신 파수꾼이란 백성을 제대로 인도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예루살렘을 구속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혼자서 충분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이 일을 위하여 쉬지 않고 떠들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그렇다. 누군가가 헌신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10. 7절의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누구를 쉬지 못하게 하라는 말인가?

    여호와: 예루살렘의 회복은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여호와로 쉬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들이 쉬지 않고 떠들게 만드신 분이 그들에게 준 임무는 거꾸로 자신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서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기도해야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일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11. 예루살렘을 세워 온 세상에서 찬송을 받을 그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인가?

    자신의 식물을 빼앗기지 않는 것(8-9), 성소 뜰에서 마시는 것(9): 자신이 추수한 것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가 부강하여 안팎으로 위협이 없는 때를 말한다. 성소 뜰에서 먹는 것은 축제를 의미한다(신 16:11, 14-15). 즐거움이 넘치는 때란 말이다.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이 말씀들이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을 뜻하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셈이다.

12. 하나님께서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주지 않겠고...’라고 맹세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전에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얘기 아닌가?

    그런 고난당할 짓을 이스라엘이 했으니까 그러셨지: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미리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잘못해도 징계를 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겠다는 선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갸우뚱 거렸겠지만 우리는 쉽게 알아듣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겠다는 선언이다.

13. 10절을 포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과 관련지어 설명해보자. 왜 성문으로 나아가는가? 왜 대로를 수축하는가?

    성문으로 나아가는 것은 환영행사를 위함이요, 대로를 수축하는 것은 돌아오는 길을 닦는 일이다.

14. 기를 드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행진의 시작을 의미한다. 선두에 기가 있게 마련이다. 단체로 여행할 때 기를 세우고 가는 이유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고, 혹시 이탈하였더라도 기를 보고 찾아오라는 뜻이다. 포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이 이제는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든다. 만민의 인도자가 된다는 뜻이다. 언감생심 어떻게 이런 일이!

15. 11절의 ‘상급이 그에게 있고’에서 그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딸 시온으로 지칭되는 것을 보아도 여성인데 원문의 ‘그’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상급과 보응을 가지고 오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이 틀림없다. 그래서 바로 앞의 ‘구원’을 ‘구원자’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상급과 보응은 이스라엘에게 주려는 것(구원)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 자체를 가리킬 수(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심을 의미)도 있다.

16.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름이 바뀐다. 무엇이라고 불리는가?

    거룩한 백성,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 찾은바 된 자, 버리지 아니한 성읍: 4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객관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확인하는 셈이다.

[ 63장 ]

17. 앞장에서 시온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곧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몇 가지 종류의 붉은 색이 등장하는가(1-3)?

    네 종류, 에돔(에서의 피부 색에서 따온 표현으로 붉다는 뜻), 홍의, 포도즙, 선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탁월한 문학적 능력이다.

18. 에돔(수도 보스라)에서 오시는 이의 복장에 어떤 특징이 있는가?

    선혈이 낭자함: 마치 포도즙틀을 밟는 자의 옷에 포도 물이 튀듯이 피가 튀어 있다. 보스라는 좋은 포도가 많이 나는 곳이란다. 쉽게 상상되는 모습이다.

19. 무슨 일을 하다가 오시길래 복장이 그런가?

    만민을 심판하고 오는 길이다. 상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장차 이런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 편이기 때문이다.

20. 누가 그를 도와주었는가?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었다: 성도의 구원에 관한한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이다. 어느 누구와 상의한 것도 아니요, 어느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21. 에돔이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처절하게 심판을 당하는가?

    에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을 자의 상징이다. 실제로는 이스라엘에 인접해 있으면서 이스라엘이 망할 즈음에 못된 짓을 많이 했다(옵 1:10-14). 중요한 것은 에돔의 심판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겠다는 선언이다. ‘원수 갚는 날’과 ‘구속의 해’는 같은 의미이다(4절).

22.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忿)이 나를 붙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전적으로 혼자의 힘으로 감당했다. ‘나의 분노가 나를 지탱하였다’고 한다면 우리말 식으로는 ‘분노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이겠지만 본문의 문맥은 ‘다른 이’ 대신에 ‘나의 분노’가 그 일을 하게 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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