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4장


1. 54:1-56:8은 ‘종’의 사역의 결과에 대한 설명이다. 잉태치도 못하고 생산치도 못했고 구로치도 못했던 남편없는 여인이란 누구를 가리킬까? 이 여인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1차적으로는 고난 받은 유다 백성들, 2차적으로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원래 이방인): 갈 4:21-31(본문의 1절이 인용됨)을 보면 약속의 자손이 육체의 자손이 되고 육체의 자손이 약속의 자손이 되기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잉태치 못한 자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신약의 상황에서는 그렇다. 구약적 상황에서는 바벨론 포로로 가서 고난 당하는 유대인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자식이 많을 것(1), 최고의 남편을 맞을 것(5): 낳지도 않은 자식이 어떻게 많아지는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리라(호 2:23, 롬 9:25)고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일 뿐이다. 양자를 들이면 되지(요 1:12-13)! 인간적으로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복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여인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가는 사 4:1에 잘 나타나 있다.

2. 누구에게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시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

    자식도 남편도 없는 여인에게 자식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나서면 그런 일이 생긴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12 제자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했는지 보라. 우리를 통해서 태어나야 할 자식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3. ‘장막터를 넓히며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라’는 말씀은 교회를 지을 때 터를 넓게 잡고 건물을 크게 지으라는 뜻인가?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후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것이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을 땅 사고 건물을 짓는 것에 바로 인용하는 것은 다소 억지이다. 건물을 크고 넓게 지어놓아야 사람이 모인다는 생각과 본문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분이 거할 성읍마저 주신다(3절).

4.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회복시켜주신다고 하시는가?

    자식과 성읍(3): 조상들에게 ‘후손과 땅’을 주리라고 하신 약속과 동일한 것이다. 후일에 보면 이 후손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5. ‘청년 때 수치’와 ‘과부 때 치욕’이란?

    청년 때 수치: 구체적인 어떤 행위라기보다는 ‘한창 잘 나갈 때 하나님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엉뚱한 짓만 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외적의 침입을 당하고 어려움에 빠지면 하나님을 찾다가도 살기 좋아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이스라엘의 방종함을 뜻하는 것이다. 한창 때 바람피우던 남편이 늙고 병들어 부인을 찾아가면 듣는 말이 ‘한창 때는 제 멋대로 돌아다니더니 병들고 힘도 없으니 나를 찾아왔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듣는 책망과 좀 비슷하지 않을까?

    과부 때 치욕: 아내로서 남편에게 신실치 못했다가 남편없이 고생하던 것을 지적하는 표현: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해서 이민족으로부터 침략과 유린당한 모습이다.

6. 청년 때의 수치와 과부 때의 치욕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남편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창조자, 만군의 여호와, 거룩한 자,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잊겠다는데!

7.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유대인들: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2차적으로는 신약시대에 버림받은 유대인들이 종말에는 회복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롬 3:1-3).

8.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실지라도 회복은 풍성하게 주실 것임을 7-8을 근거로 설명해보자.

    징계는 ‘잠간’이지만 회복은 ‘큰 긍휼’과 ‘영원한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9.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면?

    다시는 노하거나 책망하지 않겠다고 하신 점(9): 홍수 이후에 다시는 물이 땅을 뒤덮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 이유도 결코 사람이 좋아질 것을 예상하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창 8:21). 마음의 계획이 어려서부터 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그런 심판을 행치 않겠다고 하신 것은 일종의 한시적 포기이기도 하고 그만큼 마음이 아프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해결책이 있기 때문에 징계를 포기하신 것이다.

10. ‘산들이 떠나간다’는 표현이 성경에는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 21:21)라고 하셨다. 왜 애꿎은 산을 자꾸 들먹일까?

    산이 옮기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뜻의 히브리 관용어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도 일어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언약이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럴 때 ‘해가 서쪽에서 뜬다 해도 ...’라고 할 텐데.

11.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은 마치 광풍에 밀려 요동하는 배에 탄 자와 같다. 엄청난 고생 가운데서 구해내어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는가?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성읍(11-12)과 평강(13-17): 이 묘사는 결국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묘사이다. 아름다운 곳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릴 그 날을 기대하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12.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란 무슨 뜻일까?

    마치 스테인드글래스처럼 돌에 아름다운 테두리로 장식하여 지은 건물: 벽은 그러하고 기초, 성문, 성첩(뾰족탑)은 더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지은 성읍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황금보석으로 꾸민 12대문이 있는 성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다(계 21 장). 아름다운 테두리를 하는 돌은 일반적인 돌이 아니라 보석이어야 어울린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존귀함과 영광스러움을 잘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석으로 꾸미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보석이 된 자신과 형제를 보라.

13.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은 단순하게 거할 성읍만 주시는 것이 아니다. 또 무슨 복을 주시는가?

    평강할 것, 공포가 없을 것: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서 평강할 것이며, 의로 설 것이므로 학대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진작 그랬더라면. 복 중에 가장 기본적인 복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만든다. 말씀으로 승부해야 한다. 결과로 주어진 것이 평강이다.

14. 회복된 이스라엘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 건드리면?

    자기가 당한다: 이 복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약속하셨던 것이기도 하다(창 12:3).

15. 17절 끝의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무엇이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물려받을 몫)이라는 말인가?

    자신을 치는 자는 도리어 화를 당하게 하고, 자신을 송사하는 자는 도리어 정죄를 당하게 하는 권리: 이러면 아무도 못 건드린다. 유도가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여 넘어뜨리는 경기라고 하든가? 그렇다면 압도적으로 힘이 강해도 넘어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대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자격을 주셨다.

16. 전장에서 말한 종의 고난이 이 장이 말하는 ‘회복과 영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스라엘(이방인, 유대인)의 회복과 영화는 오로지 종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다.

17. 본 장에는 여러 개의 이미지(임신치 못하는 여인, 장막의 확장, 재결합 부부, 찬란한 성, 무력한 적)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들을 잘 연결하여 메시지를 구성해보라.

    하나님께서 임신치 못하는 여인의 수치를 깨끗이 씻는 날에 자녀들이 아주 많아지겠기에 장막을 크게 확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실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한 비유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앞으로 찬란한 성처럼 재건될 것이고 이들을 포로로 잡아간 대적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교회의 확장과 견고함).

[ 54장의 내용은 55장 3절 상반절까지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여호와의 백성이 회복되고 행복한 삶(54장)을 이야기한 다음에 이 아름다운 곳으로 초대하는 글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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