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2:13~53:12


( 53장은 네 번째 종의 노래로서 신구약의, 가장 복음적인 핵심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슬픈, 희망에 찬 노래이다. 4복음서의 요약이다. 그런데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장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것과, 히브리어가 어려워 본문을 잘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난외주가 유독 많다(난외주가 더 정확한 것으로 생각됨). 한 페이지에 한, 두 개 있을까 말까한 난외주가 무려 6개나 붙어있다. 아마 최고 기록 아닐까? )

1. 히브리 원문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표현 없이(개역성경의 작은 글자는 이것을 의미함) ‘보라 내 종이로다’하고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메시야를 종이라고 표현할까?

    종처럼 낮아져서 사명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만 강조한다면 ‘사자’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종이라고 하는 것은 ‘낮아짐’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복수로 종이라 불렀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는데 이를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를 세우는 것이다. 곧 복수의 대표로서 단수이다. 복수는 실패자이나, 단수는 이 실패를 회복하는 존재다. 이 단수도 이스라엘인데 개인으로서 전체의 대표로서 전체를 회복시키고 구원할 자이다.

2. ‘형통하리니’라는 표현을 난외주에는 ‘지혜롭게 행하리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른 영어번역에는 ‘지혜롭게 행하다’, ‘번영하다’ ‘성공하다’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원어가 이런 뜻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상관있는 단어들이다. 정리한다면 ‘나의 종이 자기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나니’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은 무엇인가?

    다 이루었다(요 19:30).

3. 위의 질문을 참고하면 13절은 한 구절로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해보자.

    낮아져 고난 받으심(=다 이루심)과 높이 들려서 장차 심판주로 오심.

4. 14절의 번역도 원문의 순서를 바꾼 것과 2인칭 대명사(난외주 2번)를 3인칭으로 바꾼 것은 잘못이다. 다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적어도 이 부분은 한글 공동번역이 잘 되어 있다)

‘무리가 너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와 같이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 할 수 없었고, 그의 형체는 사람이 아니었다.’ 1) 무리가 너, 즉 이스라엘을 보고 기막혀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 이스라엘의 이런 모습이 곧 누구의 모습인가?

    1) 한 때 정말 잘 나가던 이스라엘이다. 출애굽이나 가나안을 정복하던 모습이나 다윗의 시대를 보라. 그런데 지금은 머나먼 바벨론에 잡혀가서 유브라데 강의 둑을 쌓느라고 흙 속에 파묻혀 지렁이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한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애 4:7-8).’

    2) 메시야가 이런 모습을 당한다는 것이다.

5. 15절의 ‘후에는’은 ‘그리하여’로 번역하고 ‘놀랠 것’은 난외주처럼 ‘뿌릴 것’이라고 번역함이 옳다(대부분의 영역본처럼). 메시야가 기가 막힐 고난을 당하고 ‘그리하여 열방에 (자신의 피를) 뿌릴 것’이다. 그러자 열왕이 놀래서 입을 봉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에 그렇게 놀라는지 본문의 표현대로 대답해 보자.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15): 듣도, 보도 못한 일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주어지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도 처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유대인에게만 전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열왕(이방인)들을 구속하시는 그 방법, 하나님 자신이 낮아지고 자신의 피를 뿌려 구원을 이루는 이런 일은 어떤 종교도 철학도 가르쳐주지 않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놀라면서 증거하는 것이 53장이다.

[ 53 장 ]
본문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모습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찾아보자.

6. 53:1의 난외주를 보자. ‘우리의 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들은 것’이다. 원문에도 분명히 ‘들은 것’이다. 우리가 들은 것을 (전한다고 하자) 도대체 누가 믿겠느냐는 말인데 그러면 여기 ‘우리’는 누구인가?

    구속받은 열왕: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일을 깨닫게 된 열왕들이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믿겠느냐면서 하는 말이다. 이 부분을 잘라낸 채 1절의 ‘우리’를 선지자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로 ‘여호와의 능력있는 팔이 행한 것을 누가 듣고 깨달았느냐?’는 뜻이다. 이 열왕들이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찾아보자. 출신 성분의 미약함(1-2), 사람들을 위한 희생(3-5), 완전한 순종(7), 그럼에도 씨를 보게 됨(8, 10), 악인과 함께 처형되었으나 부자의 묘실에 장사됨(9).

    이 열왕들의 놀람이 곧 우리의 놀람이기도 하다. 복음송 ‘왜 날 사랑하나?’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그저 놀랄 뿐이다. 복음이 그러한 것임을 선지자는 700여년 전에 이렇게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다.

7.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서 왔고, 십자가에 죽어서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 것을 믿은 사람이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고향에서 배척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제자들조차 죽었다가 살아나실 것을 믿지 않았고, 메시아의 일에 대해서도 부활하신 후에까지 오해하고 있었다.

8.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했을 때 나다나엘의 대답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는 것이었다. 이것이 본문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2절은 예수의 출신 성분이 보잘 것 없을 것임을 나타낸다. 연한 순이란 먹기 좋은 부드러움이 아니요, 힘이 없음을 말한다. 메시야의 특징은 볼품이 없고 연약하다. 어떤 모습으로 왔으면 사람에게 멋있었을까? 고운 모양, 풍채, 수퍼 스타, 연예인, 대중의 우상같은 방법으로 왔으면 참 쉬웠을 텐데... 예수님의 사역 방법은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 교제이었다. 사람을 가르치고 키우는 일은 경제적인 논리, 조직, 분위기가 아니라 인격적 교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9.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30대 초반인 예수를 가리켜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고 물었던 것은 이 본문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을 많이 겪으실 것이다(3절):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30대 초반의 예수님이 40대는 확실하게 넘은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10. 기도해서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진 분들도 그냥 편하게 기도해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하는 기침을 자신도 하고, 환자가 당하는 아픔을 자신도 당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함부로 병 고치는 은사를 사모했다가는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실 것을 언급하는 말이 본문에 있는가?

    질고를 아는 자: 병을 체험하신 분이라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온갖 병을 다 겪으셨단 말인가? 기도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그 병을 체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1. 메시야는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 1) 하나님, 2) 제자들 (베드로), 3)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4) 군병들, 5) 빌라도에게서 각각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 정리해보자.

    1) 하나님: 버림을 받았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마도 메시야가 겪은 가장 큰 고통일 것. 제자들이나 군중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이다. 겟세마네의 고통(마 26:38)도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제자들 (베드로): 잡혔을 때 모두가 부인하고 도망 가버렸다. 다시 살아날 것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예수의 사역을 이해하고 알아주지도 않았다.
    3)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반드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천에 옮겼다.
    4) 군병들: 아무 것도 모른 채 상관의 명에 따라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깡패 집단의 행동대장처럼.
    5) 빌라도: 소신없이 결정을 내렸다가 만고의 역적이 되고 말았다. 사도신경에 이름이 올랐으니.

12. 다음 구절은 본문의 어느 구절과 가장 가까운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요 1:10-11)

    3절: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13. 3절의 ‘우리도’는 누구와 누구가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말인가?

    먼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유대인이다. 그 다음으로 ‘열왕들’(즉 이방인)이다. 구약에서 이방인이란 버림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런 이방인을 위해서(4 -5절의 우리)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당하다니... 그래서 열왕들이 놀라는 것이다.

14. 세상을 구하려고 오는 메시야가 투사나 위대한 장군처럼 등장하지 않고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함: 이것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왜 인간을 만들고 그들을 사랑하사 이렇게까지 하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특한 사랑이다.

15. 다음 구절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어느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가?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4절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질고(疾苦)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다.

16.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신 21:23 말씀을 생각했다. 본문의 말씀은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생각과 동일하고 어떤 점은 다르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의 허물 때문이냐는 점(갈 3:13)이 다르다: 자기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 때문이란 것을 유대인들이 알지 못했다(=8절).

17. 메시야가 당한 고난을 베드로는 본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도 그런 삶을 살자는 것이다. 어떤 삶?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벧전 2:19-24)

    하나님 때문에 인내하는 삶: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아무런 죄나 잘못이 없음에도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지 않았느냐? 우리도 그 본을 따라 인내하자.

18. 그가 ...은 우리의 ...을 인함이요? 그가 ... 으로 우리가 ...를 누린다?(5-7) 사고낸 사람이 벌을 받아야지! 원래 이런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방법이다.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대속: 생축이든 사람이든 초태생은 내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초태생을 죽이는 대신에 대속물을 내라고 하셨다. 대속이란 개념을 하나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 죄를 예수께서 대속케 하시려고...

19. 다 양 같아서? 양이 어때서? 순하고, 털이 희고 ...

    양은 눈이 어두워 앞에서 이끄는 대로 따라간단다. 선두가 길을 잘못 들어서 절벽에서 떨어지면 줄줄이 떨어진다나? 우리 인생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을 갔단다. 캘빈의 말을 빌린다면 ‘전적부패’이다.

20.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하신 ‘일(예수를 통하여)’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신론)을 배우고 인간(인론)을 배우고 예수(기독론)을 배우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하나님, 인간, 예수)가 한꺼번에 나타나 있는 구절을 찾아보자.

    6절: 주권자이신 여호와께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그 분에게 대신 죄를 지게 하셨다.

21. 7절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는 대제사장들의 심문과 빌라도의 심문에 정말 아무 대답도 않으셨는가? 병사들의 모독과 채찍에 아무 말씀도 않으셨는가? 마 26:57-68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변명이나 무죄선고를 받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니 유죄 선고를 받을만한 말만 골라 가면서 답변을 하셨다(마 26:63-64). 십자가 상에서 여러 말씀을 남기셨으나 병사들의 모욕이나 채찍을 피하기 위한 말씀은 한 마디도 않으셨다. ‘곤욕을 당하여’의 원어적 의미는 ‘그가 자신을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는 뜻이다. 그 분은 스스로 고난을 받으셨다.

22. 8절은 원문 자체가 어렵다고 한다. NIV를 보자. By oppression and judgment he was taken away. And who can speak of his descendants? For he was cut off from the land of the living: for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he was stricken. 우리말 번역의 ‘그 세대’란 말이 다르게 번역되었다. 강압적인 재판을 받고 끌려갔으니 누가 그 후손을 생각했겠느냐는 뜻이다. 예수님에게는 혈육도 없고 제자들도 다 도망쳐버렸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후손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문맥상으로도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한 이유를 바로 뒤에서 찾는다면?

    10절에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23. 9절도 열왕들이 보고 놀라는 것 중의 하나이다. 왜 이것이 놀라운 일이 되는지 다른 번역을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다음 두 번역을 비교해보자. 접속사는 NKJV, 내용은 NIV를 보라.

[NKJV] And they made His grave with the wicked--But with the rich at His death, Because He had done no violence, Nor was any deceit in His mouth.
[NIV] He was assigned a grave with the wicked, and with the rich in his death, though he had done no violence, nor was any deceit in his mouth.

    나무에 달린 시체는 저주받은 것이라서 정상적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부자의 무덤에 들어갔다(9)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두 번역을 정돈하면 ‘그는 악인과 함께 무덤이 지정되었다(정상적인 장례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라 버려져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주검은 부자와 함께 놓여졌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악행도 행하지 않았으며, 그의 입에는 어떤 속임수도 없었기 때문이다.’로 된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도 어울리고 원어상의 순서에 가깝다.

24. 9절 말씀의 두 가지 양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동원한 사람이 있다면?

    강도 둘(마 28:38)과 아리마대 요셉(마 27:57-60):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느라고 약은 꾀를 썼다. 공회가 사형을 언도한다면 스데반의 경우처럼 돌로 쳐 죽일 수밖에 없다. 백성들이 거부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다.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야 십자가 처형이 가능했다. 자기들의 법을 따라 돌로 쳤더라면 예수는 무덤에 장례를 치를 수 없는데 꾀를 부린다는 것이 그만 시체를 처리할 권한이 빌라도에게 넘어갔고 요셉의 요구에 따라 부자의 묘에 장례를 치른 것이다. 당황한 그들이 무덤을 단단히 지켜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덕분에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었다는 증거만 더 늘었다(시체가 없어짐, 로마병사들이 지켰음에도 실패함, 돈을 주고 매수해야 했음).

25. ‘누가 예수를 죽으려고 이 땅에 왔다고 가르치는가?’ 이것은 어느 사이비 교단에서 자기의 교주를 선전하기 위해서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내면서 헤드라인으로 뽑은 구절이다.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닌데 세상의 관원들이 실수로 죽였으므로(고전 2:8을 근거로, 9절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도) 예수는 임무를 다 하지 못하였다. 그 일을 완성하려고 자기가 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결정적인 구절을 본문에서 제시한다면?

    1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다. 또 그런 고난이 결코 실패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26. 희생제물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메시야는 왜 하필이면 ‘속건 제물’이어야 하는가(10절)? 번제도, 화목제도 있는데?

    속건제는 부채에 대한 상환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종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담이 저지른 빚을 상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7. 강포를 행치 않았음에도 질고를 당한 결과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만족스러울 것(11): 씨를 보게 되며, 날이 길 것이며, 여호와의 뜻이 성취될 것이다(10).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11),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할 것임(12).

28. 하나님의 종은 어떤 이유로 분깃을 나누어 가지는가(4가지 이유)?

    자기 영혼을 죽음에 내어 놓았고(완료형),
    범죄자 중의 하나로 취급받았으며(완료형),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졌으며(완료형),
    범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심(미완료: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뜻)으로.

29. 하나님의 종은 존귀한 자, 곧 강한 자와 분깃을 나눈다. 강한 자가 혼자 독차지 하던 것을 빼앗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강한 자는 누구인가? 눅 11:21-22를 참고하라.

    사탄: 강한 자와 분깃을 나누어 가지는 자는 더 강한 자이다. 하나님의 종이 이런 고초를 겪고서 사탄과 분깃(하나님의 백성들)을 나누어 가진다.

3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자의인가? 타의인가?

    자의(12): 자기 스스로 범죄자들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버렸다. 요 10:17-18에 동일한 말씀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31. 계속되는 두 가지 주제, 인간의 타락과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나? 53장이 이 질문에 어떤 해답을 주는가?

    하나님께서 그(당신의 외아들)에게 대신 짐을 지게 하심으로: 결국은 하나님께서 희생하셔서 타락한 인생을 회복시키신다.

32. 다음 단락에 각각 제목을 붙여보고 종에 관한 내용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사 52:13-15:
사 53:1-3:
사 53:4-6:
사 53:7-9:
사 53:10-12:

    사 52:13-15: 높아짐
    사 53:1-3: 배척당함
    사 53:4-6: 고난
    사 53:7-9: 배척당함
    사 53:10-12: 높아짐

    앞뒤가 서로 대칭이 되고 대칭 축은 ‘종의 고난’이다. 고난이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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