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1~52:12


1. 본문은 세 번의 ‘들으라’와 세 번의 ‘깨어라’로 구성되어 있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이것을 근거로 문단을 나누어보고 각각의 경우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자.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1), 율법을 들으라(4), 사람을 두려워 말라(7).
    ‘깨어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시오(9, 대답은 12절 이하, 너희를 결코 잊지 않았다), 시온아 깨어라(17, 정신 차려라), 시온아 깨어라(52:1, 곧 포로에서 놓여나 돌아갈 것이니 일어날 힘을 내라)

2. ‘나를 들을지어다’는 말은 아무래도 외국말의 영향을 받은 표현이다. 순우리말로는 ‘내 말을 들으라’이다. 각설하고 내 말의 핵심은 무엇인가?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 여호와께서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게 하실 것이다: 49-50장에서 여호와의 종이 이룰 구속을 노래하다가 51장에서 다시 포로의 상황으로 돌아가지만 채찍이나 슬픈 사연을 말하기보다는 위로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찬 회복의 날이 있을 것이다.

3.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가 아브라함과 사라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반석이나 흙에서 너희를 빚어내는 것’이나 ‘죽은 몸이나 다를 바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후손을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너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서 자기 백성으로 회복케 하실 능력이 충분하시다. 지나가다가 우묵한 구덩이가 보이거든 저게 내가 누워 있던 곳이구나 라고 생각해보자. 저런 구덩이에 누워 있어야 할 나를 이런 존재로 만드셨다는 감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흙덩이나 패인 반석은 내 형제요, 사촌인 셈이다. 인생이 그런 존재 아니냐는 말이다.

4. 광야를 에덴동산으로,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으로 만드는 것과 동일한 개념을 본문에서 두 가지 더 찾아낸다면?

    반석에서 너희를 떠낸 것, 흙구덩이에서 너희를 파낸 것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후손을 창성케 한 것: 반석이나 흙구덩이에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브라함의 몸(롬 4:19)에서 후손을 번성케 하신 하나님이시니 죽어서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스라엘도 그렇게 회복시킬 수 있다는 선언이다.

5. 하나님의 공의는 만민의 빛이요 구원이다. 그런데 왜 만민을 심판하신다는가?

    공의(율법)는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잘 하는 자에게는 상을, 못하는 자에게는 벌을! 만민을 위하여 빛을 비추었으나 끝내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을 수밖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무조건 만민을 구원하실 것이다? 지옥은 없다? 그렇게 한량없이 마음씨가 좋기만하신 하나님은 아니다.

6. 어떤 불신 친구가 이런 소리를 했다 ‘내가 살아 있으니 하나님도 있는 것이지 내가 죽어 없어지면 어쩔 건데?’ 좋은 대답은 무엇일까?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하나님의 구원과 의는 폐하여지지 않는다(6): 물론 그 대상(여기서는 불신 친구의 영혼)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죽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 화장해서 깨끗이 사라진 자들도 다시 불러서 부활시킨다. 영벌을 주려고! 지독하신 하나님!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는 쉬운 일이다.

7.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이나 비난이 당사자에게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 핍박을 이겨내기 위해서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핍박자들의 권세나 힘이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8): 인간의 권력이나 부는 좀이나 벌레가 파먹은 옷같이 곧 상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와 구원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옷이나 양털은 일시적인 것에 대한 예로 사용되었다. 질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8.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기의 때가 되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

    출애굽 때의 하나님의 역사하심(9-10):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던 하나님께서 한 번 더 그런 역사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9절의 ‘깨소서’는 break가 아니라 ‘awake’이다. 자기들이 잘못해서 징계 받는 줄은 모르고 하나님이 주무시는 줄로 착각하고 하는 소리다. 이런 멍청한 요청에 대해 답변을 주시기 전에 참고 발언이 12-16절이고 진짜 답변은 51:17-52:12절까지다.

9. 라합을 저미는 것이나 용을 찌르는 것은 내용상 동일한 표현이다. 라합이 무엇이길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애굽을 상징하는 바다의 괴물을 가리키는 말이다(사 30:7): 하나님께서 바다를 주관하신다는 표현이다. 용은 바로를 상징하고. 11절은 백성들의 기대사항이다(원어의 시제와 인칭이 12절 이하와 확실히 구별된다)

10.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자와 하나님을 비교하면?

    죽을 사람, 풀같이 될 인자(12), 반면에 하나님은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신 분(13),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15): 학대자의 분노는 현실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멀어 보이는 탓인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의 근시안적인 시력이 문제이다.

11. 이스라엘이 ‘여호와여 깨소서’ 했더니(9) 하나님은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라고 하신다(17). 물론 그전에 다른 답변도 하셨다(12-16). 예루살렘을 향하여 깨라고 하시는 이유를 예루살렘의 형편에서 찾는다면?

    술에 취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인데다 그를 부축하거나 돌보아줄 자식도 없다. 정신차려라는 말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깨어야 할 자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라는 말이다.

12. 19절의 ‘이 두 가지 일’은 앞의 일을 가리킬까, 뒤쪽을 가리킬까?

    황폐와 멸망, 기근과 칼을 가리킨다. 19절 가운데 ‘곧’ 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13.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다(20)는 것은 죽었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비유인가?

    포로로 잡혀와서 제대로 구실을 못하는 것: 모퉁이라고 번역된 말은 ‘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대부분의 영역본들은 head로 번역함). 온 거리의 머리란 성 안의 모든 거리가 시작되는 출발점, 즉 성문을 가리킨다. 성문이 닫힌 후에 도착해서 들어오지 못한 나그네들은 밤새도록 성문 밖에 발이 묶인 채 날이 새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단다. 그처럼 발이 묶인 채 꼼짝 못하고 있는 포로 신세를 가리킨다. 그러니 아들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18).

14. 이스라엘이 취한 술이 일반적인 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호와의 분노의 잔(17, 22)과 그로인한 자식들의 능력 없음(20),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21 = 포도주 없이 취한 자).

15. 예루살렘이 깨어나면 그를 비틀거리게 하던 잔을 어떻게 하시려는가?

    네 원수의 손에 두리라(23). 이 원수들이 너희를 땅바닥에 엎드리라 하고는 몸이 불편해서 웅크리기라도 하면 ‘똑 바로 안 펴?’ 하면서 밟곤 했다.

16. ‘내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과는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다.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내(나)’라는 표현을 얼마나 사용하셨는지(특히 4-6) 왜 그러시는지 생각해보자.

    33번, 엄청나게 많이 사용하셨다. 능력이 비슷한 사람 사이에서는 이런 어투가 기피대상일 수도 있지만 포로로 잡혀가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참된 위로자, 진정한 구원자는 하나님뿐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52장]

17. 세 번째 ‘깰지어다’(52:1)는 두 번째와 비교하면 어떻게 다른가?

    일어날 힘을 내라: 두 번째 ‘깨라’는 말은 정신차려라는 말이었고 이제는 힘을 내라(=힘을 입을지어다)는 것이다. 힘을 내서 뭘 하는데? 떠나야지(11절)!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니 준비하라(=아름다운 옷을 입을 지어다)는 말이다.

18. 예루살렘에 들어온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민족들: 다시는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으리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회복된 뒤에도 여전히 헬라,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단순히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말세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진다.

19. 프로 선수들에게는 이적료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몸값이다. 다른 구단에 팔릴 때는 선수에게 지불해야하는 연봉 외에 소유 구단에 이적료를 따로 지불해야한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팔려갔는가?

    값도 없이 팔려갔으므로 몸값을 내지 않고 풀려날 것이다(3): 이것은 풀려나는 종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아무리 값없이 팔려갔어도 종을 소유한 주인이 값없이 해방시키는 법은 없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그냥 해방시키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다.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값없이 풀려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라는 사람을 사용하셨다. 오늘 우리의 구원도 우리 편에서 보면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일이다. 귀한 값을 하나님께서 대신 지불하셨다. 그래서 속량(값을 지불하고 속함)이라고 한다.

20. 이스라엘이 값없이 풀려난 전례가 있는가?

    애굽에서 나올 때: 내 백성이 기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다는 것은 출애굽 이전 상황을 가리킨다.

21.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이 정말 까닭 없는 일이었을까? 이스라엘이 범죄했기 때문에 징계를 당했다는 말이 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애굽이나 앗수르가 그래야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애굽에서는 우거했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하는 포로 상황은 바벨론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이 한 짓은 까닭 없는 일이다.

22. ‘내가 어떻게 할꼬?’하는 말은 사람이 답답할 때 하는 탄식조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을 쓰실 때도 그럴까?

    능력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탄식이겠지만 능력있는 분이 이럴 때는 ‘내가 개입해야겠다’는 의사 표시로 보아야 한다. 뒤에 나오는 ‘내 이름을 알리라’ ‘나인줄 알리라’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이름 값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23.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실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종일토록 모독을 해도 이스라엘의 징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셨지만 이제 그 이름값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24. 포로에게 석방을 알리기 위해서 달려오는 전령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때가 묻었든 무좀발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은 무슨 의미로 사용하였을까?

    복음전하는 자의 발걸음(롬 10:15)도 이와 같다: 여기서는 바벨론에서 해방될 날이 곧 올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이 부분(7-12)의 히브리어는 아름다운 시란다! 바벨론 포로 이야기의 절정이요, 결론이다.

25.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파수꾼들이 어떻게 화답하는가?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다(8):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감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아오신다는 감격이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대면하여(눈이 마주 봄) 보는 감격이다. 고대에 왕이 궁을 떠나 피해 있다가 돌아오는 것을 백성들이 환영하는 마음(아관파천에서 ‘전하께서 돌아오신다’)이 이랬을까?

26.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구속하는 사건이 단순히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10절을 근거로 설명해보자.

    예루살렘의 구속은 ‘열방’과 ‘모든 땅끝’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단순히 구경거리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66:18-19).

27.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떠나는 것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이요(12),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가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성이 돌아온다기보다는 여호와(여호와의 기구 = 법궤: 느부갓네살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운반하여 갔던 것)께서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단순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삶은 있을 수 없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만 정결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래야 한다. 목사 장로만 잘 하면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다.

28.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발교되지 아니한 반죽을 메고 나온 것을 생각해보면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애굽에서는 그만큼 황급히 나왔다. 그러나 바벨론에서는 천천히, 준비해서 돌아온다. BC 539에 바사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고레스 원년에 돌아가도 좋다는 명령이 나지만 2년 후(BC 537)에 1진이 출발하였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