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0장


1. 부정한 일로 아내를 내어버릴 때는 이혼증서를 써주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있느냐는 말은 무슨 뜻일까? 반드시 신 24:1-4을 생각해보아야 한다(한글 개역은 약간의 혼동이 있을 수 있으므로 다른 성경과 꼭 비교해서 볼 것).

    너희 어미가 버림을 받은 것이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죄로 말미암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둔 말씀이다: 신 24장의 강조점은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려면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주되 함부로 취소하지 말라는 것이다(핵심은 1절이 아니라 4절이다). 신중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혼증서 없이 이혼하게 되면 이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전남편이 이혼한 적이 없다고 하면 간음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혼증서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좋다는 허가증이나 마찬가지다. 그게 어디 있느냐는 것은 다시 관계를 합법적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언제 찾아오셨나? 언제 불렀기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는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반응이 없었으며 마침내는 독생자를 보냈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도 영접지도 않을 것을 의미한다(행 3:22-26, 요 1:9-11).

3.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마음대로 주무르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사로잡힐 수 있는가?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탓이다. 애굽에 베풀었던 기적을 보라.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왜 나타나지 않는가? 너희들의 죄 때문이다. 반면에 뒤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종은 어떻게 순종하는가?

4. 49장의 ‘나’가 4절부터 다시 등장한다. 이 ‘나’는 무슨 일을 가장 잘 하게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게 전하는 것: 학자의 혀는 잘 교육받은, 훈련된 혀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그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얕잡아 보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히 달랐다고 한다(막 1).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고 말씀하라고 하신 것만 말한다고 하셨다(요 5).

5. 메시야가 학자의 혀와 학자의 귀를 가졌다는 것은 메시야가 두 가지 사역을 하리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도와주는 것과 듣는 것: 도와주는 것은 병자, 귀신, 가난한 자들에게 베푼 사역이고 듣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고 순종하는 것 즉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가리킨다.

6. 내가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으며 때리며 모욕하는 자가 있어도 피하거나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5):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7. 온갖 모욕을 당하여도 부끄러워 아니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기 때문이다(7). 여호와께서 도우시면 정말 부끄럽지도 괴롭지도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는가(두 가지)?

    얼굴을 굳게 한다(7):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을 우리 식으로 하면 얼굴에 철판을 깐다는 말이 될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견디어 내겠다는 말이다(참고 겔 3:8-9). 부싯돌이 다른 돌보다 단단한 모양이다.

    나를 의롭다고 하실 이를 의지한다(8):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들었기에 순종하는 것이고 또 그 분이 의롭다고 하실 것이기에 모든 수치와 모욕을 견딜 수 있다.

8. 본문의 ‘나’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 눅 18:31-33에서 인용하신 ‘선지자’는 누구이겠는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본문 6절을 자신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본문에 적합한 인물은 없다.

9. 수염을 뽑으면 어떨까? 따갑지 않을까?

    따가운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의 고대 사회에서는 가장 큰 모독이었다. 고려시대 무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수염과 관련이 있다(정중부의 난).

10.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만 바라볼 때이었다.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에 빠지고 말았다(마 14:29-30). ‘나’가 온갖 모욕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는 결과로 나와 다투는 자, 대적하는 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좀에게 먹히는 옷(9): 세월이 좀 먹나? 라는 말이 있었다. 세월이야 좀과 상관이 없을런지 몰라도 옷은 아무리 좋아도 좀이 쏠면 끝난 것이다. 아무리 강하고 무서운 대적이라도 좀에게 먹히는 옷일 뿐이다.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는 것이 이 모든 수치와 고통을 이기는 방법이다.

11. 예수께서 자신을 버려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했지만 재림 때에는 양과 염소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에서도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결과가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가?

    흑암 중에 행하며, 빛이 없는 자라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와(10) 자신의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는 자신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11). 불대신 불꽃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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