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9장


[ 2부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주제이다. 2부 1주제는 ‘고레스를 통한 바벨론 포로의 귀환이라는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회복’(40-48장)이라면 2부 2주제는 ‘메시야를 통한 영적인 이스라엘의 회복’(49-56:8)이다 ]

1. 섬들아 나를 들으라? Islands! Lift me up? 설마 그렇게 해석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 아니다. Hear me!를 우리말로 하면 ‘나를 들으라’가 아니고 ‘내 말을 들으라’이다. 그러니까 ‘나를 들으라’는 것은 ‘외국어에 감염된 우리말’인 셈이다. 각설하고 ‘섬들아’ ‘백성들아’라는 것은 온 세상이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기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의 회복마저 새발의 피(경한 일)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다(6).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8-13)

2. ‘나’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하는지 찾아보자.
하나님께서 아주 잘 아시는 자(1),
하나님께서 쓰실 날카로운 무기(2),
제대로 된 하나님의 종(3),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자(4),
야곱과 이스라엘을 돌이키게 할 존귀한 자(5),
그것보다 더 큰 일, 곧 이방인을 돌이키게 할 자(6),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7): 이런 조건에 가장 적합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3~8번] 예수의 출생과 삶에 관련된 다음 내용을 본문에서 찾는다면?

3. 세밀하고 많은 내용이 예언되었다.

    하나님께서 아주 잘 아시는 자(1),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부르고 이름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언의 성취라는 뜻이다(마 1:21, 눅 1:31).

4.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분이시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종(3)

5.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큰 복이지만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심판이기도 하다. 장차 이 땅을 심판하실 심판 주로 오실 것이다.

    입이 하나님께서 쓰실 날카로운 무기(2)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위력을 말한다(히 4:12, 계 1:16, 19:15).

6. 예수는 3년간 이 땅에서 수많은 이적과 능력을 행하셨지만 결국은 모두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고 말았다.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자(4),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7)

7. 예수의 사역은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4b)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원하시고 보응하신다는 고백이다.

8. 예수는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분이시다.

    야곱과 이스라엘을 돌이키게 할 존귀한 자(5), 그것보다 더 큰 일, 곧 이방인을 돌이키게 할 자(6, 42:5-7)

9.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면 어떻게 달라지는가?

    황제: ‘너를 보고 열 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7c)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며 이런 고난을 받는 자들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귀하게 되는 자는 황제가 부럽지 않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고 밤새 고민하던 다리오를 보라.

10. 은혜의 때 곧 구원의 날이 되면 이 종을 통하여 무슨 일을 하시는가?

    나라를 일으킴(8), 백성을 양식이 풍부한 곳(자산이란 벌거숭이 산이란 뜻)과 샘물 근원으로 이끄심(10), 원방에 흩어진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심(12, 18, 22): 은혜의 날에는 세상 각처에서 모여들 것인데 마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11.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자와 흑암에 갇힌 자(9)를 구해내는 방식이 사람의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

    말씀만으로: 우리는 건물을 폭파하든지, 대적을 죽이든지, 돈을 들고 가서 사정을 하든지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나오라’ ‘나타나라’ 하면 끝이다.

12. 길에서 먹는다(9)? 거지인가?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자산(민둥산)의 풀’과 동일한 의미이다.

13. 시님이 어디를 뜻하는지 분명하게는 알 수는 없다. 다른 정보도 없다면 본문만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동방 아니면 남방일테니, 동방이 가장 가능성이 많겠다.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특히, 중국 사람들이나 중국을 통해서 서남아시아를 선교하는 분들).

14.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어떻게 위로하셨을까? 위로하였으니 긍휼히 여긴다(13)? 긍휼히 여겨서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래도 순서가 바뀐 듯하다. 비슷한 표현이 44:21-23에 있으니 이 본문과 비교해보고 ‘위로’의 다른 의미를 찾아보자.

    단순하게 슬픈 자를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의미이다. 이사야 전체를 살펴보면 고난받는 메시야를 통한 구속을 말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온 천지를 불러서 즐거이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15. 후일에 있을 일이지만 포로로 잡혀 가서 고생하는 이스라엘이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 그리고 잊으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결코 잊지 않았다(15-16): 여인이 젖 먹는 자식을 잊어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젖 먹는 자식일까? 아이를 길러본 여자는 잘 안다. 애기가 젖 먹을 때를 엄마는 저절로 안다. 그냥 두면 젖이 불어서 터질듯이 아픈데 어떻게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는가? 도무지 그럴 수 없지만 혹시 그렇더라도 나는 너를 손바닥에 새기고 잊지 않았다. (손바닥에 쓰면 지워진다고 손등에 쓰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나님보다 더 한가?)

16. 아이를 낳으면서도 ‘제대로 자라기나 하겠나?’ 제대로 먹이지 못해서 ‘사람 구실이라도 하겠나?’ 걱정하면서 키운 아이가 뜻밖에 크게 성공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면 부모의 마음은 더 감사하고 기쁘다. 건강하게 자라주기만 해도 감사한데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다니...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이런 감사를 드릴 것이라고 한다. 어떤 자녀가?

    고난 중에 낳은 자녀(20): 원문의 뜻은 ‘사별의 아들들’이다. 죽어서 헤어진 아이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요셉을 만난 야곱의 기분 아닐까?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을 우리에게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차적으로는 대적에게 예루살렘이 망할 때 많은 자녀가 죽을 것이지만 이런 회복의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이다.

17. 이스라엘이 회복된 모습은 어떠한지 세 가지로 요약해 보자.

    단장한 신부 같다(18). 땅이 비좁다(19-21). 강성한 나라가 될 것이다(23): 각종 노리개(돌아온 자녀들)로 단장한 신부가 얼마나 자랑하고 싶을까? 자식을 잃고 홀로 된 여인이 수많은 아름다운 자녀를 거느리게 된 것과 같다. 그것도 전직이 왕이요 왕비이었던 양부와 유모가 딸린 자녀를 두게 될 것이다.

18. 본문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보기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21, 25).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네가 나를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23, 26): 인간을 창조하시고 고통 가운데서도 멈추지 않고,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분과 교제를 나누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

19.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자들은 포학하고 강한 자들이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그들을 이겨낼 수 없는 강한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까?

    자중지란을 일으켜서(26): 아무리 강하고 힘센 군대라도 이렇게 되면 자신의 강함을 자랑할 수 없다. 유도가 자신의 힘보다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라던가? 강하다고 용사라고 자랑하는 것을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어버리면 결국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자신의 자랑을 오만하게 내세우는 것을 접어야 할텐데...

20.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에 대한 1차적 의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이다. 2차적 의미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도 본문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열국을 시녀로 둘 만큼 강성하지 못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에 대한 궁극적 의미는 무엇일까?

    신약시대에 교회를 통한 인류 구원: 민족과 나라에 대한 구별 없이 온 인류가 복음 아래서 하나 되는 것을 가리킨다.

21. 언젠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런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49:14-50:3까지다. 이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1) 나는 결코 너희를 잊지 않았다(15-16).
    2) 반드시 회복시킬 것이다(17-26): 회복에 대한 묘사가 가장 자세하고 분량이 많은 것은 여기에 선지자의 메시지의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3) 버림받은 것처럼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다(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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