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8장


1.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좋은 이름은 다 가졌으나 하는 짓은 개차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름이다. 유다의 근원(물들)이란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태어나실 메시야를 염두에 둔 표현 아닐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룩한 백성이지만 성실치도 의롭지도 않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부르긴 하는데(2), 완악하고, 목의 힘줄은 무쇠 같고(멍에를 거부하는 완고함), 이마는 놋(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감각)과 같다(4). 귀가 열리지 않는 사람,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고 한다(8).

2. 하나님은 과거에도 장래사를 말씀하셨고 이루셨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동일한 내용을 3절과 5절에서 반복하셨지만 말씀하시는 의도가 약간 차이가 있어 보인다)

    3절: ‘홀연히’ 라는 표현에 주목하면 이스라엘의 구속(포로에서 돌아옴)도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5절: 하나님은 우상과 대조적인 참 신이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상과 구별됨을 알리려고 사용하신 방법은?

    미리 말씀하신 것을 이루심(5): 5절의 ‘내 신’과 ‘내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신상’은 같은 말이다.

4. 하나님께서 우상과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근본 이유는?

    이제 새 일을 창조(바라)하니 믿으라.

5.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일은 이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천지창조보다, 출애굽보다 더 큰 일이라는 말씀인데(43:16-18)?

    문맥상으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에서의 귀환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설명이고 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서 죽임을 당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을 뜻하기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출애굽이란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인데도 그것을 잊어버려도 될만한 새로운 일을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6. 하나님께서 악하기만 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의 이름(영광, 영예)을 위하여(9, 11, 시 23:3):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있는 능력이 없는 죄인들에게는 정말 희소식이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 이유가 있다면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있으나 근본 이유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일로 인하여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 하는 말씀이다.

7. 10절의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는 표현은 난하주에 고난의 ‘풀무로 시련하였노라’고 되어있다. 은을 연단하는 것이나, 풀무에서 시련하는 것은 같은 말이다.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는 무슨 뜻일까?

    이스라엘이 은처럼 제련되지 않았다는 뜻이 제일 무난해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한 연단이나 시련이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뜻이다.

8.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는(12) ‘내가 불러 낸 이스라엘아’라는 말이다. 불러냈다는 것은 택하였다는 것과 동일하다. ‘처음이요 마지막’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될까?

    본문의 표현을 이용하면 ‘하늘과 땅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13): 어느 복음송의 가사를 빌린다면 ‘모든 것’이다. He's everything to me! 수학적으로 말하면 ‘필요충분조건’이다.

9. 새 일을 창조하겠다고 하시면서(6) 계속 뜸을 들이고 있다(7-13, 16-19). 새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나의 사랑하는 자(14)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20)이다.

10. 새 일을 창조하겠다고 하시면서(6) 계속 뜸을 들이고 있다. 다음 각 구절들이 새 일과 관련지어서 한 두 단어로 요약해보라. 가령, 7-8절은 ‘(새 일의) 크기’처럼.

    7-8: 크기
    9-11: 이유
    12-13: 당위성
    16: 재당부
    17-19: 회한

11. 못난 아들에게 야단을 치면서도 해줄 것은 다 해주는 것이 아버지다. 그러면서 ‘너를 사랑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는 차마 말하기 싫으면 ‘너 잘 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애비 욕 얻어먹지 않으려고 해주는 거다’ 라면서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해준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럴 것 같다. 그런 느낌을 주는 구절을 두 군데 지적한다면?

    9절과 11절의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 하리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위하는 것이다.

12. 바벨론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가 누구일까(14)?

    고레스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레스에게 이런 표현은 너무 과한 것 아닌가? 결국 이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고레스가 메시야의 사역을 예표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기에 이런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자연인 고레스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다.

13.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않은 것, 즉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 무엇인가?

    고레스를 통해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

14. 16절의 ‘나’는 누구일까? 여호와? 이사야?

    숨어있는 메시야: 문맥상으로 여호와일 수도 없고 이사야일 수도 없다. 16절의 ‘이제’는 이사야의 때가 아니라 100 수 십여년 후 이스라엘의 상황이다. ‘그 말이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하시는 ‘나’를 이사야로 보기 어렵다. 나타나지 않으면서 이 일들을 진행시키시는 분은 누구인가? 이사야 전체 문맥에서 이런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메시야이다. 휘장 뒤에 숨어 계시다가 49장 이후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49:5-6, 1-2절의 ‘나’는 이사야). 그 분은 7장의 임마누엘이며 8장에서도 유대를 지키는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 고레스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의 말이 전해질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거기 계셨다(16). ‘내’가 새 일을 창조하리라고 하신다(6-7). 이스라엘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라면 천지창조보다 더 큰 일이다. 메시야의 사역 외에 이것에 해당할 일은 없다.

15.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에게 유익한 것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이요 갈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는?

    평강도 의도 잃어버리고 후손이 끊어졌다(18-19): ‘같았으리라’는 표현이 단순한 회한을 넘어서 앞으로 그렇게 풍성한 복이 회복될 것에 대한 소망이 담긴 표현이기도 하다. 평강과 의는 영적인 복이고 자손은 세속(육)적인 복을 의미한다면 영육 간에 복을 누리는 방법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듣는 것이다.

16. 어찌되었건 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21절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둘 다: 출애굽 때에 있었던 놀라운 일이 다시 있을 것이다.

17. 22절은 웬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자에게는 21절과 같은 놀라운 기적이 따르겠지만 이것을 끝내 거부하는 자에게는 평강이 없을 것이다. 선지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라는 충고이다.

    < 이사야서의 2부(40-56:8)는 두 단락으로 나뉜다. 48장이 첫 부분을 마무리한다. 고레스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포로에서 귀환함)에 대한 예언을 마무리하는 장이다. 다음 부분은 먼 훗날에 여호와의 종이 이룰 영적인 구원에 관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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