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6~47장


1. 벨은 누구이며, 느보는 또 누구인가?

    우상: ‘그들의 우상들’과 동일한 표현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짐승과 가축, 혹은 사람에게 실려 다니면서 짐만 되는 것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기는커녕 잡혀간 것들: 벨(아람방언으로 ‘주’라는 뜻인데 히브리 식으로 하면 ‘바알’이다)은 바벨론의 우두머리 신(主神)이며 흔히 말둑(Marduk)이라고 한다. 느보(=나부)도 바벨론의 신으로 말둑의 아들, 혹은 사자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문학과 과학, 지혜의 신이란다(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나 나보니두스의 이름이 이 우상과 관련됨).

2. 벨과 느보를 가리키는 말을 있는대로 찾아보자(대명사는 제외).

    그들의 우상들,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던 것,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것, 무거운 짐(1), 그 짐(2, 현대인의 성경은 이 부분을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내지 못하고’라고 번역함): 벨과 느보는 우상일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기는커녕 짐일뿐이다. 엎드러졌고 구부러졌다고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확실한 미래를 의미하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몰락한 독재자의 동상과 비슷한 처지이다.

3. 벨과 느보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짐이었다. 그렇다면 3-7절의 내용과 어떻게 대조를 이루는가?

    거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짐이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의 원문을 직역하면 ‘태주에서부터 운반된 자’라는 뜻이다. 짐승이 엎드러지고 구부러진 우상을 운반하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운반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하나님께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독생자마저 희생시키셨으니 말이다.

4. 결혼식에서 흔히 사용하는 ‘흰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라는 표현은 참으로 명언이다. 문제는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는 것이지 마음이야... 하나님은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다.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신다고?

    태중에서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능력과 뜻을 지니신 분이시다. 난 아직도 흰 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은데? 감사할 일이다.

5.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끝내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므로(4): 이스라엘만 하나님께서 지으셨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을지라도 핵심은 자기 백성이요, 인간이다. 인간을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만드시고 그 인간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만드셨으므로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다. 그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방편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핵심은 어떤 의도로 인간을 만드셨느냐는 것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라는 말에서도 ‘인간을 교제의 대상으로,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만드시고 사랑하셨음을 은근히 표현하고 있다.

6.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가?

    재료를 자신이 대고(크기나 질을 사람이 결정하고), 자신(사람)이 만들고(그런데 어떻게 사람보다 뛰어나겠으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서 사람이 메고 옮기고(자신도 의존적인 존재), 스스로 움직여 행동하지 못하고(능력이 전혀 없고), 대답하거나 구원하지도 못하는 것에 절하고 섬기다니. 하나님과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보라는 말이다.

7.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길 때(6-7)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뭐라고 통탄하실까?

    그렇게 무능한 우상과 나를 비교할 수 있느냐?

8. 이스라엘이 (대)장부가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남자니까 남자답게 행동하라? 이런 말을 듣고 용감해진 사나이도 더러 있긴 하겠지만 어딘가 약하다.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즉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시니(8) 용기를 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서 나온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기이다. 남자니까? 그것도 용기는 용기지만 약한 용기다.

9. 하나님은 우상과 어떻게 다른가?

    종말을 미리 말하고 그렇게 이루시는 분이시다(10).

10. 동방에서 불려오는 독수리는 누굴까?

    고레스일 것이다: 독수리처럼 빠르게 온 세상을 정복하되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모략을 이룰) 사람이다.

11. 이스라엘은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두 가지다. 어떤 두 가지 마음인가?

    하나님의 창조물(특별한 관계를 가졌다는 뜻)로 버릴 수 없는 자식(3-4)인데, 한편으로는 완악하고 패역한 자식(12)이다.

12. 완악하고 의에서 멀리 떠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무엇인가?(13). 개역의 난하주와 다른 번역을 참고하여 확인해보자.

    의, 구원, 영광: 13절을 요약하면 ‘나의 의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속히 구원을 얻을 것이며 나의 영광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낼 것’이다. 이사야서에는 유독 난하주(欄下註)가 많이 붙어 있는데(원문의 독해가 어렵다는 뜻) 대체로 난하주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구원과 영광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주신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인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신 희생하신 것을 감안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반역자들(8), 완악한 자들(12)이라고 꾸짖으면서도 그들의 태도와 관계없이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준다.

이사야 46~47장

1. 바벨론과 갈대아는 어떤 관계일까?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 갈대아는 민족을 뜻하기도 하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사이(시날)와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역을 뜻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이 민족이 앗수르.에 대항하여 세운 나라가 바벨론이고, 수도도 바벨론이다.

2. 바벨론의 멸망을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가?

    여자의 일생: 곱고 아리따운 처녀(난공불락의 바벨론 성을 가리키는 듯)가 수치를 당함, 열국의 어미 노릇을 빼앗김, 자녀마저 잃은 과부로 전락하는 것에 비유함.

3. 티끌에 앉아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극도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다. 곱고 아리따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떤 수치를 당하는가?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가는 것(노예가 됨)과 속살을 드러내는 것(포로로 잡혀감): 맷돌을 돌리는 것은 여자 노예의 전유물이었다.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는 것이 정숙하고 아리따운 처녀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4. 바벨론의 멸망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우리의 구속자’ 얘기는 왜 나올까?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이라서 기쁘다는 것보다는 그 분의 위대하심에 경의를 표하는 말이다.

5. 여기서 주모는 酒母가 아니라 主母이다. 열국의 여주인, 즉 어미이다. 얼마나 화려할까? 그런데 어떻게 되는가?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6.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신 이는 누구인가?

    하나님: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그리하게 하셨을지라도 바벨론은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했다(6).

7. 능력이 있어서 사치하고 평안함을 즐기는 것이야 능력있는 자의 복이라고 치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도 안중에 없는 교만으로 치닫는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8)? 아마도 하나님마저 얕잡아보는 자세가 이 말 속에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8. 바벨론이 이렇게 망하는 이유는?

    네게 맡긴 내 백성을 돌아보지 않음(6-7), 교만함(8-10, 사치, 지혜와 지식): 하나님없이 사는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이 때로는 오히려 화근이 되기도 한다(10). 그래서 홀연히 임하는 재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타락한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은 약자를 억압하고, 사치와 안일에 젖어 하나님도 무시하는 교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9. ‘진언과 사술을 사용해보라’는 12-13절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조롱: 아무 소용 없는 짓 아니냐?

10.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은 초개 같아서 불꽃의 세력에서 자신을 구원치 못할 것이다. 초개가 불꽃 앞에서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이들이 불에 타면 결과는 어떻게 된다고 하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나무가 타면 숯불이라도 남지만 초개는 그렇지 않고, ‘그 앞에 앉을만한 불도 아니라’ 손이라도 쬘만한 불씨조차도 없을 것이란 뜻이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