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2장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문맥상으로는 앞 장에서 말한 ‘동방에서 일으킨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는 고레스이겠지만 일반적인 왕의 성격과는 다른 점이 많아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자연스럽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가?

    공의(1, 3, 4), 유순함(2), 자비(3), 영원(4): 고레스가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는 과정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힘으로 점령하기보다는 좋은 평판이 퍼져서 거의 자발적으로 항복하고 오히려 환영했다고 한다. 그런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고레스만을 가리키는 것으로는 온전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이 일반적인 정복자나 왕으로 보기에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새로 정권을 잡은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왕이 바뀌어도 요란스러운 것이 정상이다. 과거 정권과의 차별성을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별다른 것이 없는 비전이라도 요란스럽게 포장해서 내놓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리없이 힘없이 나타나신 메시야의 모습과 흡사하다.

4.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이유는 가만히 두어도 꺼질 것이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고약한 심뽀를 가진 사람이다. 여호와의 종은 연약한 자를 소중하게 돌아보시는 온유한 자이다. 죄로 인해 소망 없이 꺼져가는 인류를 다시 소생시키시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이다. 41장에서는 용맹스럽기 그지없는 용사이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온유하신 자이다. 하나님이시면서 온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런 묘사에 적합한 자는 없다.

5. 왜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는가? 육지는 가만히 있고?

    ‘육지는 말할 것도 없고 섬들마저’라는 뜻이다. 온 세상이 빠짐없이 라는 뜻이다.

6. 자식이 아버지를 부를 때는 간단한 것이 좋다. ‘우리 학교 동창회 회장이시며 모모회사 사장이시며 인자하고 너그럽기 그지없으신 우리 아버지...’ 어딘가 이상하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 이렇게 긴 적이 잘 없는데 여기서는 왜 이럴까(5)?

    사적인 관계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위엄을 보이시는 듯하다. 새 일을 시작하겠다는 엄숙한 선언의 순간이다.

7. 6절의 ‘의로’의 ‘의’는 목적일까? 수식일까?

    다른 한글 역본들은 ‘의를 위하여’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in rightousness'로 번역하였다. 양쪽의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의를 위하여 의로운 방법으로 너를 불렀다.’ 공의를 이루시려는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방법으로 일을 하실 것이므로!

8.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한다’는 것은 ‘너를 통해서 언약을 새롭게 체결한다’는 뜻이다. 언약을 새롭게 체결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왜 이방의 빛이 되는 걸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겨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효화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고 관계를 계속하겠다는 말씀이다. 이방의 빛으로 세우겠다는 것은 그 언약에 이방인을 포함시키겠다는 선언이다. 과거와 비교할 때 더욱 확장된 언약이다.

9. 하나님께서 불러 세운 그 분의 역할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빛(희망)이 되는 것(7)과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8)

10.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8)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새삼스럽게 강조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령,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동대문 쌍칼이다’ 아는 졸개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와 비교해보자.

    이름에 걸맞는 행위를 한다는 말씀이다. 하고자 한 것은 반드시 이루고야만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전에 예언한 일이 이루었느니라’(9)는 말씀도 동일한 의미로 앞으로 될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는 뜻이다.

11. 소경의 눈을 밝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 구절이 신약의 어떤 장면에 나오는가?

    메시야의 가장 중요한 표징이다(마 11:5). 유대인들에게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의 답변의 서두이다.

12. 전에 예언했다가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가?

    출애굽, 가나안 정복등도 해당되겠지만 산헤립으로 부터의 구원이 가장 적절하다. 과거의 확실한 경험처럼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이다. 가깝게는 고레스로 말미암은 구원이겠고 나아가서는 메시야로 말미암은 구원이 있을 것이다.

13. 새 노래를 불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새 일을 이루시기 때문, 옛 노래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출애굽 때 부른 노래가 적절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일은 출애굽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하다는 뜻이다.

14.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사람들이 하필이면 왜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과 그 거민인가?

    ‘땅 끝에 거하는 자들’이란 표현과 동일하다. 온 세상 모든 이들이 예외없이 찬송하라는 뜻이다.

15. 추가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사람들과 그들이 거하는 장소가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 셀라의 거민들, 산 꼭대기에서’ 이다(11).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두 사람이 거하는 곳에서도 예외없이 찬양하라는 뜻이다.

16. 여호와의 모습을 ‘용사, 전사’로 묘사하는 이유는? 더 높은 왕으로 소개하지 않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친히 싸우시는 분이시므로: 직위나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하시는 일을 말한다.

17. 오래 동안 참으셨던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지 않고 일을 이루시고야 말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할까? 또, 누구를 향하여 무엇을 참고 계셨는가?

    산통이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반드시 되어질 일이다. 중간에 그만 둘 수도 없다. 결국은 위대한 생명이 태어난다.

    우상의 득세와 이스라엘의 고난당함.

18.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지 않으신단다. 그러면 누가 혼이 나고 누가 좋아지는가?

    혼이 날 대상: 큰 산, 작은 산, 그 곳의 초목, 강들, 못들: 한 때 잘 나가던 이들이다. 우상을 조각하거나 부어 만들고 그것을 신이라고 하던 자들이다(17).

    좋아지는 이들: 소경: 왜 소경이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소경이 무엇을 잘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은혜를 베풀겠다고만 말한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이며 왜 그러는지 알기 때문이다.

19. 소경들에게 베푸는 구원의 모습이 세 가지다. 특이점이 있다면?

    알지 못하는 길,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함: 소경에게 은혜를 베푼다면 그들을 광명으로 이끈다거나 곧은 길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 알지 못하는 길이란 전혀 상상 밖의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말이다.

20. 18-25절은 책망하는 말 같다. 이사야의 논리 전개 방식을 따르면 바로 뒤이어 징계와 구원의 내용이 뒤따라 나와야 되는데?

    이사야의 전반부는 앞으로 징계를 받을 것을 경고하는 책망과 징계와 구원의 이야기였지만 후반부는 징계중인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회복의 내용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42장의 앞부분에서 회복에 대한 말씀을 했는데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 즉 메시야를 보내야 할 현재의 형편이 이렇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현실이 귀머거리요, 소경이니 이들을 광명으로 인도해야할 메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반부의 방식을 따른다면 이 부분이 42장의 앞 부분에 와야할 성격이지만 문맥이 달라지면서 순서를 바꾼 셈이다.

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종, 사자, 친한 자(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이렇게 부르고 계시는데 이들이 어떻게 귀머거리 중에 귀머거리요, 소경 중에 소경이 되었느냐는 탄식이다. 종이면서 어떻게 친한 자(벗)이 되는가?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주종, 부부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종이면서 대등한 부부의 지위를 지닌 묘한 관계이다. 종도 되고 대등하기도 한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상상해보라. 스스로 종노릇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참고로, 하늘나라에서는 문지기나 왕이나 똑같이 행복하다.

2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존귀케 하려고 하셨으나(21) 오히려 도적맞고 탈취를 당하고 굴과 옥에 갇히고 말았다(22).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무시되는 수도 있나?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니까(24). 하나님의 뜻이 변한 것일까? 짧게 보면 그럴 수도 있으나 길게 보면 하나님의 뜻에는 변함이 없다. 이스라엘이 끝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않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이스라엘이 끝내 하나님의 선한 뜻을 거부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이 거부된 것 같아 보여도 종국의 문제가 아니라 진행 중인 한 과정일 뿐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만다.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 두지 않아도(25)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보라.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