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8장


1. 히스기야의 병이 자연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간섭하신 것임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사야를 보내서 살지 못할 것을 미리 전한 것: 히스기야의 기도문에서 스스로 그렇게 인식함(17). 히스기야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경우엿다는 말이다. 히스기야가 그런 은혜를 받을만한 일이 있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럴 필요를 느끼셨다는 말인가? 미리 귀뜸을 하고는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을 보시고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기도하시게 하면 즉시 엎드리자.

2. ‘그 즈음’이 언제일까? 히스기야는 병이 나은 후에 15년을 더 살았다. 29년간 통치하였으므로(왕하 18:2) 병이 든 것은 히스기야 14년이다(BC 701). 이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산헤립의 침공(사 36:1, 왕하 18:14)과 히스기야의 경거망동(왕하 18:13-18): 히스기야의 병은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을 무시한 것에 대한 징계의 의미이다.

3. 하나님께서 죽는다고 하시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고 감사하지 울기는 왜 우나?

    (나라의 장래가 염려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들었을 때는 산헤립이 침공해왔을 때의 일이다) 이론이야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쉽지 않으니 평소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감사할 줄 아는 훈련을 좀 하자.

4.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감는데 히스기야는 왜 벽을 향하는가?

    눈을 감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함이다. 낯을 벽으로 향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에게만 매어달리겠다는 점에서 동일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5. 죽는다고 했던 하나님의 말씀이(2) 이런 식으로 달라진다면 하나님의 예정도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하나님의 예정이 변한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느냐?’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문제다. 우리 소관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죽을 목숨이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일이다(신 29:29 참조). 히스기야의 태도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우리의 결단에 더 관심을 가지자.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려다가도 뜻을 돌이키신 적이 여러 번 있음을 기억하자.

6. 히스기야가 스스로 진실과 전심으로 행했다고 말하는 것은 간 큰 소리 아닌가?

    우리가 보기에 히스기야는 부족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모양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노력하고 살면서 그렇게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죄만 짓다가 주일이 되면 예배에 참석해서 울기만 하고...’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서는 곤란하다.

7. 6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병이 든 것은 앗수르 군대의 위협이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왜 그렇게 통곡을 했는지 이유를 알겠다. 히스기야에게 이런 위급한 때에 이런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나(하나님), 너(히스기야): 하나님께서 구원코자 하시는 것은 아무래도 ‘이 성’이고 그 이유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 때문이다(5-6).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다음 질문 참조).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이(시 23:3,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은혜가 된다.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참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8.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고 하시는 것을 근거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이유를 생각해보자.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 히스기야만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도 그럴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히스기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그것을 근거로 과분한 은혜(15년이나 생명을 연장)를 베푸신다.

9.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간다? 실제 일이라면 엄청난 일인데? 자전하는 지구가 역회전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세상이 뒤집어질 일인데?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때 일로 인하여 지구 자전궤도에서 40분 정도(태양은 1시간에 15도 나아간다. 24시간에 360도 회전하니까) 지체된 것을 천문학자들이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는데 이건 아무래도 심하다. 왜?

    여기서 10도란 말은 10칸이란 말이다. 아하스의 일영표의 10칸이 오늘날의 10도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가령, 낮을 12등분 했을 때의 10칸이라면 자그마치 150도(10시간)에 해당한다.

10. 해 그림자가 뒤로 10도나 물러가는 기적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히스기야의 병이 나을 것을 확신케 하기 위해서? 그것보다는 ‘여호와의 말씀이 확실하게 응할 것에 대한 보증’(7)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구체적으로는 히스기야의 병고침보다는 ‘예루살렘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해야겠다(6). 이전 산헤립의 침공 때 성전의 금마저 다 벗겨 주었던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앗수르로부터 보호해주겠다(6)고 약속하고 증거를 보여주었음에도 후일에 하나님을 의지 않고 바벨론을 의지한 것이 결국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원인이 된다.

11. 히스기야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죽어야 하는가?’라고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중년에(원어상 의미는, 내 날들의 고요함 가운데), 여년을 즐기지도 못하고? 고생이 다 끝나고 인생을 즐길만한 때에 죽게 된 사람이 하는 말과 비슷하다. ‘중년에’라는 말은 ‘인생의 황금기에’ 라는 말이다.

12. 흔히 하는 말로 ‘죽는 거야 두렵지 않지만 ... ’ 히스기야가 죽음을 아쉬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생존세계에서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는 것, 세상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실컷 볼 텐데 그게 무슨 걱정이냐? 좀 이상하기는 하다. 둘 다 동일하게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다(사람들을 보는 것이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13. 인생은 흔히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고도 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다고 하는데, 히스기야는 죽음을 어디에 비유하는가?

    천막을 걷는 것, 베틀에서 천을 끊어내는 것.

14. 히스기야가 제비와 학같이 지저귀고 비둘기처럼 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음이 두려워서’ 이것은 상식적인 답이다. 본문을 공부하는 경우에는 본문에 근거를 두고 대답해야 한다) 본문을 근거로 답을 한다면?

    아침까지 견디었으나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에: 밤새 고통가운데 뒤척였더라도 새벽이 되면 고통이 좀 감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사자같이 모든 뼈를 꺾으시니... 이런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는 것은 눈이 쇠하도록 주를 앙망하는 것이다.

15. 고통가운데 밤을 지새우던 히스기야에게 드디어 서광이 비친다. 어느 부분부터 얘기가 달라지는가?

    14절 중간, ‘여호와여’부터, 혹은 ‘나의 눈이 ..’ 라고 해도 되겠다: 여기서 말하는 억압이나 중보는 둘 다 법정용어이다. 빚진 자가 빚에 시달리는 것이 억압이고 그 빚에 대해서 보증을 서주는 것이 중보이다. 주를 바라보며 주께서 보증을 서주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시작이다. 자기 고통만 바라보던 히스기야가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16. 고통 가운데 신음하던 히스기야의 입에서 드디어 다른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기도가 나오고 찬양이 나온다. 기도와 찬양과 결단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기도의 핵심은 살려달라는 것이 틀림없다. 찬양의 핵심은?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하나님께) 있고, 혹은 17절: ‘종신토록 각근히(우리말은 ‘부지런히’이지만 원어는 ‘엄숙한 행진’을 뜻한다) 행하리이다’는 결단 혹은 회개라고 보면 되겠다.

17. ‘하나님께서 큰 고통을 주신 것은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는 히스기야의 고백이 맞는 말인가?

    히스기야에게는 맞는 말이다. 아니, 히스기야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옳은 말이다.

18. 히스기야의 생각으로는 사망의 고통이 왜 자기에게 왔다고 생각하는가?

    죄(17): 멸망의 구덩이 건지셨다는 말에서 ‘멸망’이란 허무, 부정을 뜻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한데서 자신을 이끌어내셔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고백이다. 산헤립의 침공을 받아서 다급해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성전을 금마저 벗겨 주었던 잘못을 가리키는 셈이다.

19. 죽음에서 벗어난 히스기야는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하심을 자녀에게 전할 수 있음을 기뻐한다(19). 그냥 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할 뻔 했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죽은 자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형벌로 죽을 수는 없었다.

20. 히스기야가 병이 나을 때 기록한 글의 요지는 철저하게 예배와 관련이 있다. 죽을 수 없는 이유와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 기쁜 이유가 그러하다. 그러니 히스기야가 생명이 연장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가?

    여호와의 전에서 찬양: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할 일이 찬양 아니던가!

21. 무화과 반죽이면 될 것을 가지고? 병에 대해서 무식한 탓 아닌가?

    무화과 반죽의 위력이 아니다. 예수께서 소경을 고치실 때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고치신 것과 유사하다. 아마 비슷한 병이 다시 들면 무화과 반죽이 효험이 없을 걸... 그런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체험케 함이다. 대하 32:24에 이 행위를 이적이라고 말한다.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안수를 하거나 능력을 행하는 것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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