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7장


1. 사 37장은 왕하 19장과 거의 동일하다. 그래도 차이가 있는지 찾아보자.

    2절의 ‘어른’(왕하에 ‘장로,’ 원문은 동일함), 7절의 ‘신’(왕하에 ‘영,’ 원문은 동일함), 36절의 ‘시체’(왕하 35절에 ‘송장,’ 원문은 동일하나 이사야에 한 단어가 추가됨), 15절이 왕하에서는 16절과 구분하지 않아서 이후에는 1절씩 차이가 남: 15절의 ‘그룹 사이에’가 왕하에는 ‘그룹들 위에’로 되어 있으나 원문 상 차이는 없다. 표현상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번역상의 차이일뿐이다. 질문의 의도는 이런 차이를 찾느라고 한번 더 읽어보자는 뜻이다.

2. 옷을 왜 찢는가? 굵은 베옷은 어떤 옷인가?

    옷을 찢는 것은 자신의 몸을 찢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만큼 애통하고...
    거치른 옷이다. 산양(염소)의 털로 짠 것이며 검은 색이다. 가는 세마포는 반대로 부드럽고, 고급이다. 옷감을 가리키는 말로 80수, 혹은 100수라고 한다. 실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가는 털이 몇 가닥 들어갔느냐를 가리키는 말로 80수 라면 80가닥을 모아서 실 한 올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수가 클수록 고급이고 부드럽다.

3. 다음 중에서 누가 제일 높은가? 누가 제일 중요한 사람인가?
[ 히스기야왕, 제사장 중 장로, 선지자 이사야 ]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높고 낮음을 따질 일이 아니다. 서로 협력해서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가야할 사람들이다. 어느 한 쪽이 높아져서도 안된다. 권력이란 측면에서 보면 히스기야 왕,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비상시국이라서). 평소에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더 중요할 것이다.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는 말씀을 잘 가르치는 목사보다 치유의 은사가 있는 권사님이 더 낫다. 병이 나아도 그래서는 곤란하다!

4. 아이가 임산(해산이 임박)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수술(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때가 되면 저절로 태어나는 것 아닌가? 이런 소리하다가는 잘 하면 마누라한테 맞아죽을 수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둘 다 죽는다.

5. 히스기야가 이런 상황을 곤란, 책벌, 능욕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곤란: 적의 침입,
    책벌: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능욕: 자신들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함(4절)

6.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히스기야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훼방하는 랍사게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들으셨을 것(4): 히스기야의 기대는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조금 실망스러워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지 않는다.

7.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전한 말에서 신앙인답지 못한 표현들을 지적한다면?

    ‘당신의 하나님,’ ‘혹시,’ ‘...하실까 하노라’(4): 신앙이 좋았던 히스기야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가? 고대에는 왕과 선지자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오늘 우리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했으니 그렇다고 이해해줄 여지가 있기는 하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은 전혀 신앙인이 아니다.

8.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응답: 풍성을 듣고 돌아가게 하되 칼에 죽게 하리라(9절)
    실제: 구스왕 디르하가가 온다는 소문에 라기스에서 일단 물러났다. 그렇게 돌아갔으면 좋았을텐데 다시 버티다가 군사를 다 잃어버렸다. 적당한 선에서 돌아갔으면 좋았을텐데, 끝까지 버티다가...

9. 구스왕 디르하가는 애굽의 25대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애굽의 왕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왕으로 꼽힌다. 당시의 애굽은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구스에 의해서 대부분이 정복되었다. 그래서 이름은 출신지를 따서 구스왕이지만 실제로는 이집트 왕이다. 앗수르왕이 구스왕 디르하가가 싸우러 온다는 말을 듣고 왜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구스왕에게 기대어 네가 끝까지 나와 붙어보겠다는 거지?’ 구스왕이 오는 것이 히스기야가 요청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기스는 예루살렘 남서쪽 45km, 립나는 예루살렘 남서쪽 40km 떨어진 곳으로 라기스의 북쪽이다. 디르하가와 싸우려면 뒤쪽의 예루살렘의 항복을 먼저 받아야했을 것이다. 산헤립이 립나에서 누구와 왜 싸운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0. 산헤립의 말(11-13)은 지금까지 자신이 정복해온 나라들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서 하는 말이다. 틀린 말이 있는가(10-13)?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 열국을 정복하는 것은 제가 잘 나서 한 짓이라 해도 유다를 침공하는 것은 유다를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이지 제가 잘난 탓이 아니다. 자신이 도끼로 사용되고 있음을 모른 채 도끼든 사람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사 10:15). 열국과 유다가 다르다는 것, 열국의 우상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산헤립이 알지 못했다! 지난 번에는 돌아가서 자랑을 늘어놓았다(왕하 18장 해설 참조). 산헤립의 비문에 ‘나의 굴레에 복종하지 않은 유다 왕 히스기야.....를 새장의 새 같이 그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두었다’ 물론 조공으로 받은 내용도 기록하였다.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보석, 상아, 궁녀... 이번 일로 돌아간 후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11. 지난 번에는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기도하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왜 직접 편지를 들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직접 기도를 드렸을까?

    그만큼 더 다급해진 것 아닐까? 답답해야 엎드리는 병은 예나 지금이나...

12. 앗수르 왕의 편지 내용을 지난 번 랍사게의 발언(18:19-25, 27-35)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길이: 짧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만 비난함.
    대상: 지난 번에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더니 이번에는 히스기야만.
    앗수르 왕이 철수할 모양이다. 다만, 그냥 가기는 열없어서 해보는 소리 아닐까? ‘저 자식이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으면 당연히 항복해야할 건데...’ 하면서.

13.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에 식민지를 경영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경제적으로 대국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역사를 훑어보면 일본은 오랫동안 한반도의 문화적 속국이었다. 그런 일본이 저렇게 큰소리를 치다니 나원참! 본문에서 비슷한 현상을 찾는다면?

    산헤립이 앗수르의 열왕들이 열방에 행한 일을 들어서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를 안다면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BC 1050에 나라를 세웠는데 히스기야 시대는 대략 BC700년경이다.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등장한 것이 겨우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최근에 디글랏빌레셀(아하스 시대), 살만에셀과 사르곤(사마리아 함락)이 등장했을 뿐이다. 큰 소리 더럽게 치고 있네!

14. 하나님을 모독하는 편지를 성전에 들고 들어오면 되나?

    하나님을 자극(?)하려는 의도인데 어쨌거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라는 뜻이니 하나님께서도 가상히 여기지 않으실까? 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다.

15. 히스기야의 기도가 어떤 점에서 훌륭한 기도인가?

    하나님 중심 기도: 자신의 필요가 있어서 하는 기도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할 이유가 더 정당하게 표현된 기도이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자신들이 살아나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접어두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강조하고 있다. 약은 건가? 지혜로운 건가?

16. 히스기야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과 앗수르왕이 말하는 신은 어떤 차이인가?

    유일하신 하나님과 신이 아닌 나무와 돌.

17.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했단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말씀(21-29)을 이런 식으로 요약해보자.

    들었노라(21-25), 아노라(28), 혼내겠노라(26-27, 29).

18.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21) 언제 그랬지?

    앞으로 확실히 그럴 것이라는 예언이다: 히브리 어법에 확실한 미래는 과거형으로 쓴다.

19. 왜 이스라엘을 처녀 딸이라고 할까?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범죄가 흉악함을 간접으로 지적하는 셈이다: 순결한 처녀를 짓밟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냐는 말이다.

20. 작은 따옴표(‘ ’)를 사용해야할 곳을 지적한다면?

    24절의 ‘내가’에서 25절의 ‘말리리라’까지: 앗수르 왕의 말을 인용한 것이므로.

21. 26절의 ‘이 일’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좁게는 앗수르왕이 말하는 각 나라에 대한 정복이지만 넓게 보면 각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뜻한다: 앗수르가 번성하여 많은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징계의 수단으로 앗수르를 사용한 것뿐임을 알라는 것이다.

22. 들의 풀, 나물, 지붕의 풀,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앗수르가 멸망시킨 나라들: 견고한 성이 돌무더기가 된 나라들의 허약함, 수명이 짧음을 표현함이다.

23. 아무리 적국의 왕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갈고리로 코에 꿰고 자갈을 입에 먹여 끌고’ 갈까(29)?

    앗수르 왕들이 하던 짓이다. 사로잡은 왕들을 이런 식으로 끌고 간 그림이 앗수르 왕들의 비석에 남아 있다. 못된 짓을 하는 놈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24. 징조치고는 어떤 점이 이상한가?

    지나고 나야 징조인 것을 아는 점: 대부분의 하나님의 뜻은 지나고 봐야 안다(출 3:12).

25.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고도 정상적인 농경생활이 몇 년만에 이루어지는가?

    3년 만에: 앗수르 군대와 싸우느라고 토지가 황폐해지고 백성들도 잡혀가거나 죽었기 때문 아닐까?

26. 이사야서에서 남은 자 사상은 대단히 중요하다. 남은 자를 통해서 다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뿌리가 깊고 질기다는 말인가?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32): 원인이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홍수 심판으로 끝내지 않고 구속사를 이어가는 것이나, 이스라엘이 그렇게 범죄하여 깨끗이 버려져야 했을 것 같은데도 계속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이루시려는 의지 때문이다.

2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그만한 투자가치가 있기 때문일까?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35):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신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시 23:3). 다윗을 위한다는 것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려고 하신다는 뜻으로 결국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원인이 있다면 이 일은 벌써 취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근거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역사는 계속된다.

28. 어떻게 하루 밤에 185,000의 군사가 다 죽을 수 있나?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애굽의 장자를 선별해서 다 죽일 수 있는 분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29. 사 37:38절을 보면 산헤립을 죽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은 그의 아들이다. 다음 왕인 에살핫돈도 아들이다. 도대체 무슨 얘긴가?

    아들들이 극심한 후계자 쟁탈전을 벌였다는 말이다. 참혹한 일이다. 7, 21-22절의 성취다.

30.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막내아들이다. 앗수르의 기록에는 산헤립의 아들 명단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없단다. 본국에도 없는 기록이 성경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흔히 국회속기록에서 삭제하듯이 앗수르에서는 이 두 아들의 이름을 삭제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스라엘에서는 삭제할 이유가 없다. 열왕기의 기록이 명백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좋은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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