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2:9~33장


이사야 32:9~20

1. 아모스가 외친 말 중에는 ‘바산 암소들아’란 말이 있다(암 4:1).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태평하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서 이사야는 ‘너희 안일한 부녀들아’,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32:9-11) 라고 심판을 선언한다. 걱정거리라고는 없던 여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5자 이내로 요약한다면?

    외적(앗수르의 산헤립)의 침입: 당황할 일, 수확이 없고, 추수할 계절이 없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야? 베로 허리를 동인다(큰 재난과 슬픔의 표시)? 형극과 질려가 날 것이다(농사지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일년 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외적의 침입뿐이다.

2.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극히 아름다운 땅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범죄하고 심판을 받는 날이 되면 이렇게 아름다운 땅이 어떤 땅으로 바뀌는가?

    형극과 질려가 나는 땅(13): 실제로 어떤 고대 기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가나안이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땅이 버림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은 수도 없이 많다. 문자 그대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3.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에 모든 짐승들과 땅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또 누가 저주를 받는가?

    땅, 성읍, 집(13), 궁전, 산, 망대(14):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기보다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이 창조의 가장 중심에 있으므로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자, 그를 위해서 만든 모든 무대장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이 함께 저주를 받는 것이다.

4. 징계인가 싶더니(9-14) 순식간에 회복을 말한다(15-20). 선지자를 보고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하지나 않을까?

    사랑과 공의라는 정반대의 성품을 하나님께서 지니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징계도 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니...

5. 성령을 부어주시면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가?

    광야가 아름다운 밭으로!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될 것(15) = 공의로운 하나님의 나라 건설: 아름다운 밭을 삼림(공동번역, 수풀)으로 여긴다는 것은 이전의 좋던 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리라는 뜻이다(표준새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완전히 다르게 번역함, 영역본들이 개역과 일치함). 성령이 임하여 물질의 복이 쏟아진다? 물질의 복과 영적인 복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공평과 의가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16-18).

6.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긴다는 것은 밭의 소출과 삼림의 소출을 비교해보면 된다. 삼림이 못하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신을 부어주시는 일이 실제로 신약시대의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개의 아름다운 밭과 광야, 그리고 삼림을 신약시대의 일로 본다면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아름다운 밭: 영적인 유대인(=그리스도인).
    광야: 이방인,
    2번째 아름다운 밭: 육적인 유대인, 삼림: 유기된 유대인.

7. 광야에 웬 공평이 있고 밭에 웬 의가 있는가?

    결국 온 땅에 공평과 의가 편만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한 구별이 없이 하나님의 공의가 임할 것이다.

8.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롬 6:23) 의의 삯은 무엇이라고 할까?

    화평, 평안과 안전(17):

9. 회복된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쉬고 있는 데 상하고 훼파되는 19절의 ‘삼림’과 ‘성읍’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을 치는 외적의 삼림과 성읍이다.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에도 고센 지방에는 개도 혀를 놀리지 않았던 것을 연상하게 하는 일이다.

10.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로 표현한다면 어떤 곳인가?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곳: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물가란 물이 마르지 않는 참으로 이상적인 곳이다. 씨 뿌린 곳에 소와 나귀를 모는 것은 농부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11. 씨를 뿌리고 그리로 소와 나귀를 몰면 어떻게 되나?

    싹을 뜯어먹지! 짐승들이 어린 싹을 뜯어먹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풍요롭다는 뜻이다. 산짐승들이 모종을 짓밟는다고 난리를 치는 우리나라 농부와 비교해보라.

이사야 33장

33장부터 35장 까지는 같은 주제(자연의 회복과 완전한 누림)로 이어져 있다.

1. 성경이 말하는 황충은 단순히 메뚜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땅 위의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는 해충을 가리킨다 (왕상 8:37, 암 7:1, 욜 1:4). 4절 번역이 애매하지만 원문 자체가 그렇다. ‘황충의 모임 같이 사람이 너희 노략물을 모을 것’이란 말과 ‘메뚜기의 뛰어 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 오르리라’는 말은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그렇다면 ‘황충이 모이는 것같이 사람들이 너희 노략물에 모일 것’이란 무슨 뜻이 되는가?

    ‘사람들이 너희의 노략물을 빼앗을 것’이라는 말이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사람들이 모으는 것은 너희가 빼앗기는 것’이다. 노략물을 사람들이 황충이 달려들어서 먹어치우듯이 없애 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2. 본문의 역사적인 정황이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가(1) ‘노략한 재물을 몽땅 빼앗기는’(4) 이런 상황이 이사야 시대에 실제로 있었다. 어떤 경우인가?

    산헤립이 침공해서 히스기야가 조공을 바쳤음에도 다시 침입하여 포위하고 있다가 하루 밤에 185,000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과 몹시 닮았다(왕하 18-19장). 이 사건이 있기 전에 회개하는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말씀 아닐까?

3. 학대와 속임을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2절이라면 그 응답은?

    3절과 5-6절이다: 현실은 속임을 당하고 학대를 당하지만 그 속에서도 평안함이 있는 것(6)은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이다.

4. 당시의 유대는 앗수르의 위험 앞에서 애굽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허사이었다. 그런 유다를 향하여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그 어떤 것보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요 힘이다.

5. 다시, 징계를 받아서 슬픈 모습(7-14)과 회복의 모습(15-16)이 그려진다. 슬픈 광경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산헤립의 군대와 관련지어 보자. 용사가 부르짖고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공을 다 받아놓고 또 침입하여 항복하란다: 수도 예루살렘이 이렇게 포위되었으니 대로에 행인이 없는 것이나 다른 성읍이나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가장 비옥하던 네 곳(레바논의 울창한 산림, 사론의 목초지, 바산과 갈멜)이 대표로 언급되었다. 이런 곳이 황폐화된다면 다른 곳이 말할 것도 없다.

6. 아무리 혹독한 징계 속에 버려둔다 해도 하나님께서 나설 때가 되면 일어나신다. ‘내가 이제’를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10)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던 앗수르의 노력은 어떻게 되는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하는 것(11):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 죽자고 고생만 하는 격이다.
    자기의 호흡의 불에 살라질 것(11): 호흡이 불이 된다면 숨을 멈추는 것 외에는 불에 살라지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7. ‘민족들’(12)이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앗수르 군대를 가리킨다. 이들이 불에 굽는 회돌(석회같이 무른 돌), 즉 석회를 불에 태움같이, 베어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같이 힘없이 무너질 때 구원을 받을 자는 누구인가?

    경건한 무리들(15): 이들은 시온의 죄인, 경건치 아니한 자들(14)과 대조적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말씀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시대가 악하고 혼란스러워도 결국 높은 곳에 거할 자는 이들이다. 시온에 거한다 해도 죄인이나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8. 경건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견고한 바위, 양식과 물을 공급하신다. 이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예루살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예루살렘은 높은 산 꼭대기(견고한 바위)에 쌓아올린 성이다.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다. 문제는 양식과 물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동안 포위를 당해도 양식과 물이 있다면 결코 함락되지 않는다. 몇 년씩이나 포위당해서 자녀를 잡아먹는 일도 있었다. 외부의 샘물을 퍼오기 위해서 바위 산을 파고 내려가는 굴을 뚫어 두었다. 아득한 옛날 여부스인들이 뚫었던 모양이다(삼하 5:8). 후일에 히스기야도 터널을 뚫었다.

9. 경건한 자들의 회복을 소개하는 10-16절과 17-24절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16절 이하를 자세히 보면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절과 17-18, 23
    너무나 당연한 현실처럼 소개하고 있다.
    시점이 다르다. 10-16절은 미래형으로 선포하지만 17-24는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이미 경건한 자들이 회복된 상태에서 앞으로 당할 이민족의 침략과 수탈을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억으로 묘사하고 있다(특히 18-19, 23). 제대로 된 왕이 없어서 나라가 망할 것을 선포하면서 오히려 위대한 왕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광활한 땅을 정복한 왕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17).

10. 17절 이하의 내용도 장차 있을 회복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보면 현실의 아픔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은 대체로 어떤가?

    두려운 압제자가 설치고, 그의 하수인이 악랄하게 수탈하고(18), 말이 통하지 않는 강포한 이민족이 압제를 가함(19).
    돛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배와 같았다(23).

11. 아무리 강대한 외적이 예루살렘을 둘러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예루살렘은 마치 어떤 도시와 같은가?

    결코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20): 말뚝이든 줄이든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항상 떠돌아다니던 유목민들에게 영원한 장막이란 꿈과 같은 곳이다.

    넓은 하수나 강이 둘러싸서 보호하는 성읍(21): 신라의 수도가 경주인 것은 한 쪽은 산이 막아주고 한 쪽은 큰 강이 둘러 있어서 외적이 침입이 어려운 탓이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큰 배를 타고도 건널 수 없는 강이 두르고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는 말이다. 예루살렘은 산 꼭대기에 있는 성읍인데 외적이 가까운 곳에서 포위하면 이런 성읍이 몹시 부러울 수도 있겠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성읍이 없다. 아마도 유브라데 강가에 있는 바벨론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12. 하나님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있을 수 없으니 말이 길어지고 여러 가지 표현을 나열할 수밖에 없다. 다음 표현을 현대식 표현으로 고친다면?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22)

    삼권의 조정자: 사법, 입법, 행정권을 다 장악하신 분이시다.

13. 고난의 때에는 가장 비옥한 곳도 황폐화 되었는데(9) 회복의 때가 되면 어떻게 되나?

    저는 자도 재물을 취할 것(23): 이 재물은 전쟁의 승리에 따른 전리품이다. 저는 자가 어떻게 재물을 취할 수 있나? 전리품이 매우 많을 것이란 뜻이다. 저는 자마저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란 뜻도 된다. 돛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처럼.

사론: 지중해 연안 욥바에서 갈멜 산까지 이어지는 평원으로 훌륭한 목초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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