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장


1. 계교를 베푸든, 맹약을 하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애굽을 의지하다니!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더욱 괘씸한 것은 무엇인가?

    물어보지도 않는 것: 하나님께 물어보았더라면 애굽의 도움을 구하라고 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걱정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면 될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좌우간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의지하고 바라기는 쉬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보다는 잔고가 많은 은행통장에서 더 큰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 없는 계교나 맹약은 패역일 뿐이다.

2. 하나님 대신 의지하려고 했던 ‘바로의 세력’과 ‘애굽의 그늘’이 결국은 무엇이 되는가?

    수치, 수욕: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보다 바로의 세력이 더 커 보이고, 하나님보다 애굽의 세력 밑에 들어가는 것이 시원해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수치와 치욕으로 끝날 것이다. 현실에만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소안은 애굽의 델타지역으로 이스라엘에서 가깝지만 하네스는 나일 강 상류에 있는 아주 먼 지역이다. 방백들과 사신들이 그리로 찾아갈지라도 얻을 것은 수치와 수욕뿐이다.

3. 남방 짐승에게 무슨 경고를 하는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남방은 네게브 즉, 사막을 가리킨다. 사막의 짐승이니 낙타를 가리키는 말이다. 낙타가 많은 짐을 싣고 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선언(경고라기보다는)이다. ‘경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무거운 짐’이란 뜻으로 번역이 가능하다(남방으로 향하는 짐승의 무거운 짐이여!). ‘오호 통재라!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는 나귀여! 그대 이름은 유다니라!’ 이런 느낌이다.

4. 이스라엘이 행한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짓이 무엇인가?

    재물과 보물을 어린 나귀와 약대에 싣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땅으로 간 것(6-7): 사자가 나오면 나귀와 약대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런 노력이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남는 것은 수치와 수욕뿐!

5. 애굽을 가리켜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고 하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종이호랑이’라고 번역하였다. 왜 그럴까?

    본문의 라합()과 여호수아의 라합(, 발음은 라캅에 가깝다)은 우리말이나 영어로도 같은 철자지만 원문상으로는 전혀 다른 단어다. 본문의 라합()은 신화에 나오는 바다 괴물이다(욥 9:13, 26:12). 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실체가 없다. 의역을 하면 ‘종이호랑이’가 적합하다.

6. 서판에 기록하고 책에 써서 영영히 있게 해야 할 것(8)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내용은 무엇일까?

    12-14보다는 6-7절 아닐까? 즉, 애굽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7. 성도들이 목사님께 ‘책망하고 치는 설교대신 은혜로운 말씀을 하시면...’ 했더니 목사님께서 이 구절(10절)을 인용하셨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는가?

    유다 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말이고, 성도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해 달라는 것으로 전혀 엉뚱한 답변이다.

8. 심판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두 가지 비유, 불쑥 나온 높은 담과 그릇을 훼파하는 토기장이는 각각 심판의 어떤 성격을 말하는가?

    불쑥 나온 높은 담: 심판의 신속성
    그릇을 훼파하는 토기장이: 심판의 철저성

9. 안연히 처하고 잠잠하면 힘을 얻고 대적을 이긴다니(15)? 그런 법도 있나? 뭔가 노력하고 애를 써야 힘을 얻는 것 아닌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간적인 노력(하나님의 뜻과 반대인, 이 경우에는 애굽을 의지하는 것)을 그만 두라는 뜻이다(7:4, 출 14:14). 이 문장에서 관심을 둬야 할 단어는 ‘돌이켜’와 ‘신뢰’이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노력은 늪에 빠지는 것과 같아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그런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10. ‘안연히 처하라, 잠잠하고 신뢰하라’고 하는데도 ‘말타고 도망하리라’ ‘빠른 짐승을 타리라’고 하니 결국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나?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정 그러면 ‘그렇게 해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결국 말타고 도망가는 일이 생기지만 너희보다 더 빠른 대적이 따라 올 것이다. 말은 맞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11.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17절) 이것은 참으로 슬픈 말이다. 왜?

    복 받을 때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레 26:8, 신 28:7, 32:30, 수 23:10) 역으로 자신이 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신들이 받아야 할 복을 원수가 받고 원수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거꾸로 자신들이 받는 상태이다.

12. 남은 자는 산 꼭대기의 깃대같고, 영 위의 기호같을 것이라는 말이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어떤 느낌일까? 하나님의 의도는?

    거의 전멸되겠구나(유대인들) ↔ 그래도 남긴다(하나님)!

13. 징계만 말하고 말아야지 그러면서 또 회복을 말하니 겁을 안내지! 징계 후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시는가?

    기다리고, 일어서고(18), 응답하시고(19), 스승을 주실 것(20-21), 우상을 싫어하게 하실 것(22):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회복시킬 것인지에 대한 언급도 없이 느닷없이 회복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회개를 할 것이라는 언급도 없다. 회복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14. 공의의 하나님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 무슨 상관인가?

    공의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대부분 심판과 관계있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은혜를 받을 자에게는 어떤 경우에라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으로 쓰였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를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15. 회복이 만사형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도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실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정로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여기서 스승은 선지자를 가리키는 셈인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비록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셈이다.

16.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입맛이 변한다. 예전에 그렇게 좋던 것이 싫어지기도 한다. 담배나 술, 도박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그럴까?

    우상에 사용되던 은과 금: 손에 묻을까 겁낼 것이다! 녹여서 다른 것으로 만들든지 팔든지 하면?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만큼 부정한 물건(=월경대, 개역성경의 난하주)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17.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복인가(23-24)?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입맛이 변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비를 주사 곡식으로 살지고 풍성하게 하신다. 그래서(=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분명히 복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도 이 땅에서 고생만 한 사람은? 특수한 경우나 특별한 사명을 받을 경우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18. 소나 나귀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왜?

    주인이 하나님을 잘 섬겨서 복을 받으면 소나 나귀도 아무 것이나 먹지 않고 ‘키와 육지창으로 까부르고(고운 겨를 뜻함) 맛있게 한 먹이를 느긋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 고산 준령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른다는 것은 상전벽해보다 더 큰 변화이고 축복이다. 있을 수 없는 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날이 큰 살육의 날이라?

    이스라엘의 회복의 문맥이니 원수에 대한 살육이라고 보아야겠다. 무너지는 망대도 원수들의 망대를 의미할 것이다. 어린 양이 등장하는 날 ‘산들아 무너져 우리를 덮어다오’하는 핍박자들의 울부짖음(계 6:15-16)과 흡사하다.

20. 원수들에게 쫓겨 어두운 곳에 숨어 살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달빛이 햇빛 같을 것이란다. 햇빛이 7배나 강해지면 괴롭겠는데?

    살갗을 태우는 뜨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밝기처럼 쏟아질 것이란 의미이다.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 떨던 자에게 태양이 솟아올라 기쁨을 주는 것의 7배(완전함을 의미)나 되는 기쁨을 줄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빛의 강렬함은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나타내기도 한다.

21. 여호와의 진노가 불붙듯 하고 하수같이 넘치는데(27-28) 어떻게 노래하고 피리(저)를 불며 즐거워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대적(앗수르, 32)을 향한 분노이기 때문이다. 앗수르가 다민족 국가임을 염두에 두면 ‘열방’ ‘여러 민족’도 앗수르를 가리키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대적을 향한 분노야 크면 클수록 좋은 것 아닌가?

22. 왕을 위하여 예비된 도벳은 깊고 넓은데 거기에 불과 많은 나무가 있단다. 거기에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단다. 하나님께서 불기만 해도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잘 타겠다! 그러면 1) 이 왕은 어느 나라 왕을 가리키는가? 2) 도벳은 무엇일까? 예루살렘 근처에 불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었다는데... 좀 생각해보고 난 후에 왕하 23:10을 참조하자.

    1) 앗수르 왕(멜렉): 원래 도벳에서 몰록에게 인신제사를 드렸는데 이제 몰록 대신 멜렉이 드려질 것이라는 언어유희이다(원어에서는 멜렉이나 몰록이나 철자가 같다. 자음만 보라).

    2) 예루살렘 남서쪽 힌놈 골짜기에 있는 화장터란다. 악인들이 쓰레기더미처럼 불태워질 것이란 뜻이다. 힌놈 골짜기에는 쓰레기를 태우는 연기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신약에서 지옥을 가리키는 게헨나 라는 말이 힌놈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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