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8장 |
1.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 ‘술에 빠진 자의 성’, ‘영화로운 관’,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 가리키는 대상은 하나다. 무엇인가? 사마리아: 면류관은 왕의 머리에 있는 모자다. 옛날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모습이 마치 왕이 모자(관)를 쓰고 있는 것으로 비유하면 잘 어울린다. 더구나 가까이에 이스르엘 평원과 샤론 평야가 있어서 기름진 곳이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로 후손들은 다른 지파와 곧잘 마찰을 일으켰다. 가나안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을 차지하였다. 르호보암에게 대적하여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지파이므로 에브라임이 북쪽 이스라엘을 뜻하게 된다. 2. 그가 취한 자요 술에 빠진 자라고 말한다. 왜? 술에 취한 사람처럼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버렸다. 예루살렘을 사모해야 할 사마리아가 과거에 다른 나라와 손잡고 예루살렘을 치려고 했다. 3. 영화로운 면류관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땅에 던져져 밟힐 것: 보석으로 치장된 면류관이 던짐을 당하는 것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발에 밟힐 수가 있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4. 2절 끝의 손은 바로 그 앞의 강하고 힘 있는 자의 손이다. 구체적으로 누구의 손인가? 앗수르의 손: 앗수르 군대의 모습을 우박, 광풍, 홍수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주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지만(2절의 ‘주께 있는’). 5. 에브라임을 가리켜 ‘쇠잔해 가는 꽃’이라 했다가 ‘처음 익은 무화과’라고도 한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의미인데? 시드는 꽃과 가장 잘 익은 과일이 어떤 공통점이 있길래? 곧 끝난다는 뜻이다. 6. 우리말에 ‘먼저 보는 놈이 임자’ 라는 속담이 있다. 본문에도 그와 흡사한 표현이 있다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4):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마리아는 먼저 보는 놈이 먹어치우듯 먹히게 ·될 것이다. 무화과는 과일이 없던 겨울이 지나고 제일 먼저 맺히는 과일이다. 더구나 처음 익은 무화과는 크고 달다. 7. 정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인물 잘난 것이 복이 되지 않는다. 거지가 인물이 잘 생긴 것은 사업(?)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에브라임에게 이런 면이 있다면? 기름진 골짜기의 꼭대기에 있는 성(1, 4): 차라리 기름진 골짜기가 없다면 적군이 그렇게 달려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을 떠나면 기름진 골짜기가 복이 아니라 적군을 불러들이는 독이 된다. 8. 주변에 기름진 골짜기(평원)가 있는 높은 성은 그야말로 영화로운 면류관이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은 적게 해도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과 마찬가지다. 뼈 빠지게 일해도 얼마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곳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은 직장이 있다면? 여호와(5): 농사가 사회의 근간이었던 고대에는 기름진 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에브라임에게는 기름진 땅보다 여호와가 면류관이어야 했다. 현실적인 모든 복보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더 복되다. 하나님이 가장 자랑스러운, 가장 귀한 것이 되어야 진정으로 복되다. 9. 재판석에 앉는 것보다 제대로 재판할 능력이 더 중요하다. 성문을 지키는 직책보다 지킬 힘이 더 중요하다. 그럴 능력도 없이 자리만 지키면 어떻게 되는지 본문의 비유를 근거로 생각해보자? 개판이 되는 거지(8): 술을 과하게 먹고 상 위에 토한 꼴이다. 그 정도가 되려면 상 위는 말할 것도 없고 방안도 엉망진창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술을 많이 마신 분들이 그 자리에서 토하고는 질벅질벅하니까 ‘방에 웬 물이냐?’면서 고무신으로 물을 퍼낸다고 벽에다 퍼올리기도 했단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실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재판석에 앉는 것은 내치를, 성문을 지키는 것은 외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게 엉망이 되었으니 결론이 뻔하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재판이고 싸움이고 간에 저절로 되게 마련이다(6). 10. 남쪽 유다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들도 술에 취했다는 것은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는 것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자들이 외세(애굽)를 의지하고 기뻐하고 있다. 누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술에 절어있다! 선지자의 관심은 유다에 있다. 그러면서도 사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사마리아를 타산지석으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상황은 이렇다. 유다의 왕과 방백, 제사장, 선지자들이 연회를 열고 있는 장소에 선지자가 나타나 사마리아에 대한 예언을 한다(1-6). ‘모처럼 선지자가 바른 소리를 하는구나’ 싶어서 경청하는데 느닷없이 “이 유다 사람도...”하면서 충격적인 선언을 하는 것이다. 11.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는 그들에게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가리켜 무엇에다 비유하며 조롱하는가? 젖 뗀 아기에게 도를 가르치려는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단다. 우리 식으로 하면 ‘가방끈이 짧아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하는 식이다. 12. 10절과 13절에는 ‘별 뜻이 없는 의성어’가 있는데 이것을 뜻이 있는 말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문맥이 이상하다.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아기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듯이 지껄이고 있다고 조롱하는 것이다. 원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기면 ‘챠브 라챠브 차브 라챠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이르 샴 제이르 샴’이 된다. 우리 말 성경에서 그 부분에 따옴표를 찍어 보자. ‘경계에 ..... 저기서도 조금’: 굳이 우리말로 한다면 ‘이러쿵 저러쿵, 저러쿵 이러쿵 궁시렁 궁시렁...’ 정도이다.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느냐니까? ‘쌸라 쌸라...’ 한다던데? 13. 이사야의 경고를 어린 아기들의 뜻 모를 말로 치부하고 들은 체 하지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기막힌 방법으로 징벌을 하신다. 어떤 징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한 대로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듣게 하실 것: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시리라는 것은 낯선 방언을 쓰는 자들을 동원하여 징벌을 가하겠다는 말이다.
그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더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일본 순사들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일본 말을 우리말로 착각하고 들으면 이상한 발음이 더러 있다) 수난 당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4. ‘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 그랬더니 ‘염라대왕한테 미리 약을 다 써놨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녀석에게는 대책이 없다. 어떤 놈들이 이런 소리를 하는가? 예루살렘의 치리자들(14): 사망과 어떤 언약을 맺었으며, 음부와 어떤 맹약을 했겠는가? 걱정없다는 큰 소리이다. 여기서 사망과 음부는 앗수르를 의미한다. 그런데 왜 거짓과 허위를 피난처로 삼았다는 것일까? 어차피 앗수르도 믿을 수 없는 나라이지만 자기들도 앗수르에게 거짓으로 복종하는 체하고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15. 사망과 언약을 맺고 음부와 맹약하였으므로 재앙이 닥칠 리가 없다고 하는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처리하시는가? 우박으로 소탕하고 물로 덮어버린다. 16. 재앙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덮치는데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19) 어딘가 어색하다. 개역성경 난하주에는 ‘그 소문만 들어도 두려우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해두었다. 어떤 번역은 ‘이 말씀을 깨닫는 것이 오히려 두려움이라’고 했다.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앞에서 젖먹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과 관련지어보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차라리 행복하다는 투의 말씀 같다. 어떤 해석은 ‘두려움이 닥쳐야 비로소 선지자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17. 사망과 맺은 언약과 음부와 맺은 맹약은 별로 효력이 없을 것이다. 마치 무엇과 비슷하다고 하는가? 몸을 펼 수 없는 짧은 침대, 몸을 다 덮지 못하는 좁은 이불: 있어도 불편 없어도 불편,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8. 사망과 맺은 언약이나 음부와 맹약한 것은 재앙을 피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짓 피난처요 허위일 뿐이다. 거짓과 허위에 기초한 건물은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진짜 피난처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신 기초돌 뿐이다(16): 이 돌을 기초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이 돌은 시험한 돌이다. 믿을 수 있는 돌이라는 말이다. 19. 튼튼한 건물을 세우려면 기초가 튼튼하고 수직으로 똑바로 서야 하며 각 부분의 규격이 정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건물을 세우시는지 재료와 두 가지 도구를 찾으라. 시험한 견고한 돌로 기초를(16), 공평의 줄로 정확한 규격을, 의의 추로 수직을 맞춘다(17). 거짓과 허위에 기초한 건물과 아주 대조적이다. 20. 브라심산은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친 곳이며(삼하 5:18-20), 기브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남부 동맹군을 격파한 곳이다(수 10:10-11). 바로 그 전투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일어나실 것이다. 왜?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치려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을 도우신 하나님이었기에 어떤 대적도 그 앞에 설 수 없었다. 이제 그 하나님께서 대적을 이끌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단다. 2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농부보다 못한 분으로 생각하느냐는 비난이다. 왜 이스라엘이 이런 비난을 듣는가? 어떤 농부도 밭을 갈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경고만 계속 하겠느냐? 22. 소회향과 대회향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들을 추수하는 도구는 무엇인가? 도리깨나 수레바퀴가 아니라 작대기와 막대기로 떤다(27). 말 안 듣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그렇게 어설플 줄 아느냐? 23.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농부의 일에 비유하고 있다. 농부는 파종하고 갈고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 한다(25). 뿌리며 심고(26) 떤다(27). 하나님이 농부보다 어리석지 않은 이상 곡식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한다. 도대체 앗수르라는 나라를 불러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파멸이 목표가 아니라 추수가 목표라는 것이다. 농부가 곡식을 거둔 후에 발굽으로 밟기도 하고 수레바퀴가 지나가게도 한다.
이것은 곡식을 부수기 위함이 아니라 알곡을 거두기 위함이다. 징계를 말하면서도 희망을 감춰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