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5장


< 24-27은 종말적인 심판에 관한 것으로, 24-25, 26-27이 밀접함 >
24장은 전 세계적인 심판에 관한 내용이었다. 25장도 종말적인 심판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25장은 타락한 성읍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다. 26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성읍에 대한 찬양이다.

< 1-3: 본 장의 전체적인 요약을 위한 질문 >

1. 기사(奇事)란 기이한 일이란 뜻이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사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옛적에 정하신 대로 성실과 진실함으로 행하신 두 가지 기사는 무엇인가?

    2절: 견고한 성을 황무케 하심: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는 것은 일종의 항복이다.
    6-8절: 연회를 베푸심: 자기 백성의 눈물을 씻기시는 일이다.

2. 사람들에게 보이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은 무엇인가?

    2절: 심판자,
    4-5절: 보호자(폭풍과 환난을 막아주는 보장(=강한 요새, 토치카)과 피난처, 폭양을 막아주는 그늘)

3. 하나님께서 두 종류의 기사를 행하셨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어떤 부류의 인간이 있는가?

    1, 9절: 하나님을 기뻐하는 부류
    10-12: 하나님을 향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 부류(눅 13:28). 이를 갈 겨를도 없겠다!

4.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어렵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표현한 말은?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1):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어느 누구도 영향을 줄 수 없으므로 작정이 곧 예정이고 실행이고 행하심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우연이란 없다.

5. 성읍, 견고한 성읍, 외인의 궁성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나님께 심판받을 성읍,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의 성읍

6. 강한 민족이 언제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언제 주를 경외하는가?

    심판으로 성읍이 다 무너진 뒤에: 강한 민족과 포학한 나라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이방족속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큰소리치던 민족’을 가리킨다. 이들이 심판을 받아 성읍이 돌무더기가 된 뒤에야 하나님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7. 강한 민족, 포학한 나라의 성읍을 무너뜨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빈궁한 자, 환난당한 빈핍한 자의 편을 드시는가?

    일단은 하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을 가리킨다: 강한 민족과 포학한 나라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권력으로 압제하던 사람을 가리킨다면 그들에게 압제를 당하던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이다. 다소 비현실적인 이 사람들은 현실적인 사람들에 비해서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능력이 없고, 게을러서 가난한 경우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상황에 따라서 고려해야 한다. 가난하다고 무조건 하나님의 편은 아니다.

8. 여호와께서 연회를 베푸시는 장소는 어디인가? 손님은 누구인가?

    이 산(6, 7): 시온 산이다(24:23).
    만민, 모든 민족, 열방: 하나님의 잔치는 항상 만민에게 열려 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마 22:9).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지는 못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9.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연회에 여러분이 참석한다면 어떤 점이 가장 감동적일까?

    하나님께 밥을 얻어먹는다는 점? 무엇을 먹고(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 마시느냐(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보다는 누구에게 얻어먹었느냐는 것이 더 감동적이지 않을까? 칼국수도 칼국수 나름이지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었다면?

10. 다음 말씀과 맥이 닿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7): 현재의 우리는 하나님과 어쩔 수 없는 간격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 갈 수 없으며 바라볼 수 없으며 그 분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이 모든 간격이 제거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셔서 교제하시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다(사 11:9).

11. 사도 바울의 힘찬 승리의 외침을 들어보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4-55). 사도 바울이 인용한 구절이 본문 어디에 있는가?

    8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직역하면 ‘그가 사망을 영원히 삼켜버릴 것이다’이다. 원래 사망이란 범죄하기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12. 하나님께서 씻기실 눈물은 웬 걸까? 하나님을 만난 감격의 눈물이라면 굳이 씻기실 필요가 없는데?

    범죄한 이후 사망에 사로잡혀 고생하며 흘린 눈물이다. ‘저주 아래서 고생 많이 했다’는 위로의 표현이다.

13. 위의 질문들과 답을 참고해서 결론을 내린다면 하나님께서 베푸실 연회에서 우리가 받을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교제 회복이다. 범죄한 이후 잃어버린 자격과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 인간을 교제의 대상으로 창조하시고 온갖 험한 과정을 다 밟으시고 다시 회복하는 것이 구속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우리를 이런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함이 우리 삶의 근본 토대이어야 한다.

14. 그 날에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전에는 무엇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몰랐다(사 1:2-3): 우상을 향하여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알지도 못했다. 그러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15. 이스라엘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건방진 것 아닌가?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친밀하게 여길 때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런 날을 기대하며 ‘기다리라’는 것이다.

16.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의 원수를 상징하는 모압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거름물 속의 초개처럼 헤엄을 친다. 말이 좋아 거름물이지 똥물이다. 헤엄이 아니라 발버둥이다. 우리나라 얘기라서 같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골 밭 한 쪽 귀퉁이에는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 똥물을 가두어두는 공간이 있다. 깊이가 허리를 조금 넘는 정도인데 표면에는 건더기가 떠 있고 그 위에 밭을 매다가 뽑은 풀을 던져두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풀밭인가 하고 밟다가 빠지는 수가 혹 있다. 그 아래는 완전히 똥물이다.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헤엄치는 자의 손을 눌러버린다.

    최후 심판의 모습과 최후의 승리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연회의 즐거움을 누리는 자와 똥물에 잠수하고 있는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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