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2장


1. 바벨론(13장), 모압(15-16장), 다메셋과 북이스라엘(17장), 구스(18장), 애굽(19장), 애굽과 구스(20장),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21장)을 향했던 이사야의 심판 예언은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 거의 마지막에야 나온다. 왜 그럴까?

    원래 진짜 선수는 나중에 나온다.

2. 바벨론을 해변광야로 묘사하면서 무언가를 암시하듯(21장) 이상 골짜기가 예루살렘을 가리키면서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왜 예루살렘을 그렇게 표현했을까?

    놀라운 이상이 있는 곳에 거하면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예루살렘은 (시온)산으로 묘사되지만 골짜기(힌놈, 기드론)로 둘러싸여 있다. 산 위에서는 멀리 내다볼 수 있지만 골짜기는 시야가 가린다. 이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암시하고 있다(8). 임박한 재난도, 성이 무너진 현실도, 하나님의 징계도 알지 못한다.

3. 지붕엔 왜 올라갔을까? 슬퍼서? 즐거워서? (바로 뒤의 ‘훤화하며 떠들던, 즐거워하던’은 시제가 없는 형용사, 분사이기 때문에 과거형으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 현재형으로 이해하면 된다)

    바로 뒤의 훤화하며 떠들며 즐거워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너희가 지금 그럴 형편이 못된다. 그래서 4절에 선지자는 대조적인 자세를 보인다: 가령,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가 히스기야에게 많은 공물을 받고 철수하는 뒷모습을 보며 지붕에서 떠들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이다.

4.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포로가 될 것이다(3).

5. 관원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다 함께 도망함: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관원들이 먼저 도망친다는 것은 배신이다. 그것도 다 함께 도망치는 것은 더욱 악한 일이다. 일부라도 죽을 각오로 지켜야지!
    활을 버림: 전시에 군인이 총을 버린다는 것은 사형감이다.

6. 선지자는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고 하면서 울기만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회개해야 한다. 민족의 앞날에 저렇게 슬픈 일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함께 울어야 한다. 가장 나쁜 말은 ‘울고 싶은 사람은 실컷 울도록 놔둬야 한다’는 것이다.

7. 분요(紛擾: 몹씨 떠들석함)와 밟힘과 혼란과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부르짖는 소리가 사무치는 것은 누구 때문인가?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의 침입자를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문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라고 말한다. 원인제공자는 분명히 이스라엘이다(11).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바벨론이다. 역사는 ‘이스라엘이 국력이 약해져서 바벨론에게 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8. 이상 골짜기의 심판 날에는 들리는 두 종류의 소리는 무엇인가?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산악에 사무치는 소리: 산악에 사무치는 소리는 성벽이 무너지자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비명이다.

9.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앗수르 군대는 어느 민족, 어떤 부대로 구성될까?

    민족: ‘엘람’과 ‘기르’(혹은 ‘길’이라고도 함, 암 1:5, 9:7): 엘람은 바벨론의 북동쪽에 위치한 바사의 중심지이고(현재의 이란), 기르는 카스피해 근처인 듯하며 아마 메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현재의 투르크).
    부대: 궁사(전통을 맨 자), 전차(병거를 탄 자), 기병(말을 탄 자), 보병부대(방패 든 자, ‘들어내었으니’라는 표현은 ‘드러내었으니’로 고쳐야 한다. 꺼내 들었다는 뜻이다).

10. 눈에 뭐가 쉬었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 이스라엘 그랬던 모양이다.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가? 보고난 후에는 무엇을 하는가? (8절의 ‘덮였던 것’을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방어벽’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본래의 의미는 ‘휘장,’ ‘덮개’로 개역의 번역이 옳은 것 같다)

    보지 못한 것: 적의 침입(7)
    보고서 한 일: 병기를 꺼내고(수풀 곡간은 수풀에 감추어져 있는 병기고를 가리킨다), 성을 수축하며, 물을 저장함(전쟁을 대비하는 일이지만 늦었다).

11. 가옥을 계수하고 허는 것은 성을 튼튼하게 할 재료를 얻기 위함이고, 저수지를 만드는 것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다.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우선순위가 틀렸다. 무엇부터 먼저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앙망하고, 존경하는 것: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다(11절 하반절).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런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할 것이다.

12. 좋은 말은 아니지만 ‘궁합’이 맞지 않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지만(12) 이스라엘의 대답은 무엇인가(13)?

    내일 죽을 거라면 오늘 실컷 먹고 죽자! 반항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선지자의 외침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으라?’ ‘짧고 굵게 살란다’는 식이다. 이러니 결국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선언을 듣게 된다(14).

13. 본문에 언급된 심판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심판하겠다는 것보다 회개하라고 하시는 말씀이기에 이스라엘이 돌이키는 시늉만 해도 심판은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다(출 32:14, 신 30:3). 산헤립이 침공해서 많은 피해를 끼치기도 했지만 결국은 하루밤에 군사를 다 잃고 돌아갔다(왕하 19장).

14. 민족의 장래에 대한 예언을 하다가 갑자기 일개인의 이야기로 바뀌는 이유가 무엇일까?

    민족 전체에 영향을 줄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고를 맡아 궁을 차지하였던 셉나가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다’고 한다. 민족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기 보다는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를 추구하였으며 아마도 친애굽 정책(사 28:14-15)을 편 주동 인물이었을 것이다.

15. 셉나의 꿈은 무엇이며 결국은 어떻게 될까?

    높은 곳의 반석에 처소를 마련하는 것(높은 산의 경사진 곳에 바위를 뚫어 묘실을 만듬)이 꿈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단단히) 말아 싸서 (장사같이 맹열히) 광막한 지역에 던지실 것이다. 그러면 가장 낮은 곳으로 굴러 가겠지(=관직에서 쫓겨나며, 지위도 낮아짐)!

16. 왕하 18:18, 사 36:3... 등 여러 곳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라는 표현이 있다. 20-22절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본문이 시기적으로 먼저이며, 이 때에는 셉나가 엘리아김보다 지위가 높았다. 16절의 ‘궁을 차지한’이란 표현은 궁내대신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17. 엘리아김을 단단한 곳에 박힌 못이 될 것이라고 하다가 곧 이어 그 못이 삭을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알기 어렵다. 어쨌거나 못이 단단한 곳에 박혔다고 믿을 일이 아니다. 거기에 걸린 것이 어느 날 한꺼번에 떨어질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떡하라는 말인가?

    하나님을 믿는 수밖에 없지! 단단한 곳에 못이 박히게 하는 이나 그것이 삭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