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장 |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계획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이 약속의 성취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아직 이 약속이 유효할지라도 (두려워함으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자.) 2. 서로가 잘 아는 이야기라고 순서에 상관없이 왔다 갔다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대화하는 당사자들은 잘 알아들어도 제 삼자는 헷갈리게 마련이다. 여기 본문의 내용 파악이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주제 파악을 위하여, 1) 1-11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의미가 같은 것까지)는 무엇인가? 내용 정리를 위하여, 2) 그것을 몇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가?
1) 안식(=쉬셨다) 3. 예수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고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했다(3:6). 예수믿는 것은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한 히브리 기자는 같은 내용을 4장에서는 무엇이라고 표현하는가? 안식에 들어감(1, 3, 6, 9, 10, 11) 4.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어떤 점이 닮았고, 어떤 점이 다른가(2절)?
닮은 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 5. 3절 뒷 부분의 ‘그 일’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안식은 폐지되거나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완성된 것이다. 단지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았을 뿐이다. 조상들의 실패를 말하면서 본을 받지 말라고 3:12-19에서 강한 톤으로 말했다. 같은 시편 구절(시 95:11)을 여기서 또 인용하면서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말하고자하는 요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불순종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절 후반부는 ‘안식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고 믿는 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안식은 창조 때로부터 여전히 있었지만 출애굽 1세대들이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음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인용구절 뒤에 ‘...는 말씀대로 들어가지 못’을 추가하면 이해하기 쉽겠다) 6. 히브리 기자는 히 3-4장에서 결국 시 95 편을 몇 번이나 인용하는가? 5번: 3:7-11, 15-19(일부는 간접 인용), 4:3, 5(간접), 7 7. 조상들의 실패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복음을 우리에게 주었을지라도 우리가 믿음(=순종)으로 화합해야 한다(2):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격적인 존재, 즉 책임과 의무를 지닌 존재로 만드셨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실상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것을 요구하신다. 믿으라는 것이다. 그것마저도 따져보면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신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자존심 아닐까? ‘이래도 내 사랑을 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안 받는 놈들이 있으니... 8. 7절에서 인용된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오늘날’이다. 이 날은 어느 날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여호수아의 날: 8절의 ‘다른 날’이 곧 오늘날이다. 여호수아의 날에 안식이 다 이루어졌더라면 훗날, 즉 ‘오늘날’ 다윗이 이 말을 또 하지 않았을 것이다는 말이다. 9.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안식일이 폐지된 것이 아니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오랜 후에 ‘오늘날’ 다시 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므로. 10. 3-11절은 문맥을 따라 읽기가 쉽지 않다. 3절에서 말하는 두 가지 사실을 4-5절은 역순으로 다시 설명한다(5절에서 문장을 마치고). 안식은 창조 때부터 준비된 것이고 들어가지 못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6-9절에서 말하는 요점은 무엇일까? 들어갈 기회가 있다(6절의 시작, 9):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예를 들면서 여전히 기회가 있으므로 그들의 본을 보지 말고 힘쓰라는 것이다. 11. 우리의 구원은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니 굳이 회개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본문은 무엇이라 하는가? 두려워하라(1),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11):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라는 말은 감사의 조건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천하게 여기는 극악무도한 죄이다. 12. 12-13절은 너무나 유명한 구절로 여기에 기록된 이유와 상관없이 독립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유를 뜻하는 글자가 문두에 있다(영어의 For). 그러니까 앞의 내용에 대한 이유 설명이다. 앞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안식에 들어가기를 게을리 할 때 받을 심판의 불가피성과 철저함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탁월한 능력이 있다. 말씀 앞에 감추인 것은 없다. 날카로운 칼(무술, 수술) 앞에 선 우리이니 꼭 순종해라. 거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에 뒤이어 ‘예수는 큰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연관이 될까? 전자가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니 당연히 후자는 심판을 피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다(16). 14. 예수를 어떤 분이라고 설명하는가? 큰 대제사장(대 앞에 큰?), 승천하신 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자, 죄없으신 자: 이제부터 예수를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3:1에서 말을 꺼냈다가 잠시 옆으로 갔다가 다시 제 길로 가려는 것이다. 15.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같은 점도 있어야 하고 다른 점도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그러한가?
같은 점: 우리의 연약함을 가진 채 시험을 받은 자, 그래서 우리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체휼(體恤)하다: 긍휼히 여기다, 동정심을 갖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