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장 |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 옆에 있는 형제를 이렇게 부르자. 귀하게 여기자. 비록 어리고 삐딱할지라도. 더 좋은 표현을 소개하면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형제’이다(롬 14:15). 2. 예수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 예수도 사도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점에서 사도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의 완성자시다. 3. 2:1에서 언급한 ‘조심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과 3:1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을 비교해보자. 들은 것(2:1)과 예수(3:1):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잘 간직해야 하는 것은 들은 것, 즉 말씀이다. 말씀은 곧 예수이므로 같은 내용의 변주이다. 같은 말을 싫증나지 않게 적절하게 변화시켜가며 반복할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솜씨다. 그러나 예수를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신성을 강조하는 셈이다. 4. 예수를 이야기하면서 모세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잘 아는 모세를 통하여 예수를 설명하기 위하여: 모세를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기존의 지식을 근거로 해서 예수를 이해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우리는? 이런 징검다리 없이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신 하나님’으로 기억하는가? 5. 모세와 예수의 같은 점은?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한 점(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애쓴 점, 성막을 세운 것과 교회를 건설한 것, 이스라엘 건설과 하나님 나라 건설, 등): 보통은 한 사람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다른 한 사람은 죽여 버리는데 반하여 모세를 치켜세우고 있다(충성, 사환). 수신자들이 유대인이니까? 흠을 낼 수 없어서 그랬을까? 한 사람을 높이면서 다른 사람을 그보다 더 높이는 것이 아름다운 방법이다. 앞 사람을 희생시켜서 뒷사람이 높아지는 방법은 좋지 못하다. 사환이라는 말은 종이나 마찬가지지만 어감의 차이가 있다. 모세에게 사환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6. 모세와 예수의 다른 점은?
예수는 집을 지은 자요 모세는 집이다(3). 7. 같이 충성했는데 한 사람이 더 영광을 받는 것은 문제 아닌가?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인집 아들과 머슴이 함께 종일 일했으면 누가 더 칭찬을 들어야 하는가? 선생님과 학생이 교실 청소를 똑 같이 했다면? 8.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만물도 마찬가지다. 집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도 저절로 된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진화론자들 9.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다(6, 14). 이와 대비되는 것들이 있다면 무엇인가? 광야의 이스라엘(8-11,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자, 범죄하여 광야에 엎드러진 자, 순종치 아니하던 자): 하나님을 시험하고 광야를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지 않았느냐? 10.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충성하였단다. 모세도 종말론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 모세가 말하는 장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장래라는 말만 나오면 종말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모세의 상태에서 장래는 예수의 때를 말한다. 11. 3:8-11절은 시 95:7-11의 인용이다. 1)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무엇인가? 2) 인용에서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1) 못난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말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보고도, 증험하고도 따르지 않았다면 보지도 않고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12. 저자가 히브리서를 기록한 궁극적인 이유를 본 장에서 찾는다면 무엇일까? 배교의 위험에 대한 권고(서로 권면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13. 어떤 방법으로 그런 위험에서 이기라고 하는가? 여러 가지 표현이 있으니 다 찾아보자.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1), 소망의 담대함(confidence)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6), 서로 권면하라(13), 강퍅케 됨을 면하라(13),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14),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너희 조상)처럼 되지 말라. 14. 당근과 채찍이란 마부가 말을 다룰 때 쓰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당근은 앞에서 끄는 역할을 하고 채찍은 뒤에 미는 역할이다. 신앙을 저버릴 위험이 있었던 성도들에게 당근과 채찍처럼 기억하라고 하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 대제사장이신 예수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조상들: 예수를 보고 앞으로 나아가되 광야에서 엎드러진 출애굽 일세대의 본을 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림같이 선명한 메시지이다. 15. 여기서 히브리 기자가 염려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인데,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라고 말하는 것은 표현이 지나친 것 아닌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거부(가데스 바네아)가 원인이다. 예수를 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거부행위이다.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예수를 저버리는 일이다. 16. 수신자들이 만약에 예수를 떠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조상들이 저질렀던 어떤 일의 재판(再版)’이라고 설명하는가? 물론 우리도 많이 들은 설교다. 조상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건은 가데스바네아(광야 40년 배회 선고)에서의 일이다. 17. 6b-13 말씀을 14-4:1에서 반복하면서 간절하게 권면하고 있다. 약간의 변화는 있으니 비교해보자
1) 그의 집(6) →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14) 18.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야 할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순종(믿음)을 요구하신다.
이율배반적이지만 둘 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을 떠나려는 성도에게는 ‘순종하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
‘정,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가슴이 아프다. 그러면서도 그런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는 전자를 기억하면서 감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떠나려는 성도에게는 경고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이 부분에 대해서 4장이 계속 설명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