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23~40


22. 모세의 부모가 바로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믿음의 행위인가?

    그 당시 상황에서는 목숨을 건 행위(하나님에 대한 신뢰 + 자식에 대한 애정): 자기 자녀가 아름답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인 것을 믿음으로 알았다는 것은 그 아이가 자기 민족을 위해서 큰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키웠어야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모세의 위대한 믿음도 부모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23. 모세의 신앙은 어떤 것이었는지 ‘믿음으로’란 표현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자.

    24절: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더 원함(다음 두 항목은 종속절)
    --죄악(무슨)의 낙을 누리기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함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김
    27절: 임금의 노함(모세에게 가장 큰 장애물)을 무서워 아니함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무엇을 참았다는 말?)
    28절: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음
    29절: 홍해를 육지같이 건넘

24. 모세가 현실적인 어마어마한 복을 가볍게 여기고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상 주심을 바라봄: 무슨 상을 바라보았을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바랐던 것과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10절의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16절의 ‘하늘에 속한 본향’이 그것이다.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이다. 우리는 가나안 땅이 곧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임을 잘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내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25. 모세가 언제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는가(27)?

    나이 40의 일이 아니라 80의 일을 말한다.

26. 모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임금의 노함: 온 세상을 다스리는 바로 왕의 분노를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눈 앞의 바로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것이 모세의 믿음이다.

27. 다음 질문을 근거로 해서 모세의 믿음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생각해보자.

    1) 일국의 왕자가 그만한 일로 도망을 가야 했을까?
    (출 2:11-15)
    2) 고난받는 동족을 버려두고 40년을 어떻게 보냈는가?
    3) 호렙산에는 왜 갔는가?
    (출 3:3)
    4)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순종했는가?
    (출 3:10, 3:11, 3:13, 4:1, 4:10, 4:13)
    모세의 질문 하나님의 질문
    내가 누구관대 (3:11) 내가 장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당신은 누구시기에) 3:13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셨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4:1) 지팡이를 뱀으로, 문둥병을 치료하는 능력, 강물이 피가 됨
    말에 능치 못하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 (4:10)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그렇게 만든 자가 내가 아니냐? 너와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4:13) 노를 발하사 전면에 나서는 일은 아론이 한다
    5) 부르심을 받고 집을 나설 때 장인에게는 무엇이라고 신고했는가?
    (출 4:18), 형제들을 보려하니 보내달라. 내 동족을 구해내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고 하기에는 쑥스러웠을지 모르겠다.
    6)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했는가?
    (출 3:18-20 ↔ 5:3),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애굽에 내린 후에라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치실까 두렵다고 말함 (사흘 길쯤 광야로 가서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키심)
    7) 그렇다면 모세의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체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믿음은 실제적인 힘이 약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모세의 믿음은 체험적인 신앙으로 바뀌어간다. 스스로 자가발전이 가능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간섭에 의해서 자라감

28. 유월절과 피뿌리는 예를 정한 것(출 12장)이 어떻게 믿음의 행위가 될 수 있는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전적으로 예수의 피를 의지해야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식이다. ‘그런다고 죽을 사람이 살아나나?’ 이런 소리하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29. 유월절 밤에 애굽인 한 사람이 맏이인데 형편이 어려워 도둑질을 하려고 이스라엘 사람의 어느 집에 숨어 있다가 이 이상한 식사를 지켜보았습니다. 뭘 좀 훔쳐가려는 데 이 사람들이 자야 무슨 사업을 할 수가 있죠? 물론 사업은 망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날 밤에 죽었을까 살았을까?

    죽지 않았다: 우리의 구원은 피 때문이지 우리 자신의 선하고 악함과는 관계없다. 비록 도둑질하러 들어갔다 할지라도 피아래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절대적이다. 우리에게는 감사할 의무만 있지, 나 자신이 못난 놈이라고 자책하고 자신을 비난하고 허물어 내릴 자격이 없다.

30.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추격해 오는 애굽의 전차부대가 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바다가 기적같이 갈라졌다. 이리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믿음으로 되어진 일인가? 그러면 주저없이 뛰어든 애굽의 군인들은 더 큰 믿음이 있는 게 아닐까?

    비록 다른 방법이 전혀 없어서 억지로 간다 해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가는 길은 믿음이요. 의미도 모른 체 ‘남이 그렇게 하더라’ 해서 하는 것은 미신(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따라간 행위(억지로 진 십자가처럼)조차 믿음이라고 인정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

31. 유월절과 홍해 사건에서 가장 의미있는 공통점이 무엇일까?

    동일한 사건을 통해서 한 민족은 구원을 얻고 한 민족은 죽임을 당한 점: 그렇게 하여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32. 가나안 점령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여리고 성 점령 이야기 하나로 마감해버렸다(30-31). 주인공 여호수아는 어디로 가고 왜 라합을 주인공처럼 기록하였을까? (라합이 11장의 문맥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해서 여리고를 두루 다닌 이야기 속에 여호수아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그의 지도력 하에서 일어난 일으므로). 라합을 부각시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를 이루는 다윗왕의 계보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가 예수를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을 기억하면 민족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온 라합이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강조할만하다.

33.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해서 두루 도는 것이 어떻게 믿음의 행위일까? 수 6장에서 여호수아가 명한 방법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어떤 불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1) 긴 대열
    2) 성 위에서 공격해오면
    3) 무슨 캠페인 하나, 나팔은 왜 불어?
    4) 벙어리가? 소리도 못 내게?
    5) 돈다고 무너지면 하루에 다 돌아버리지
    6) 오늘 일곱 바퀴 돈다고? 한 바퀴씩 돌아서 안 무너지니까 한꺼번에 일곱 바퀴 돌면 무너진다 이거지? 참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7) 길게 나팔 소리가 나거든 외치라고 이게 외친다고 무너져? ↔ 나아만의 이야기, 요단강에 7번 씻으라는 말
    8) 약탈을 금하면 무슨 재미로 싸우나?
    9) 이왕 13바퀴를 돌아야하면 첫날에 1바퀴, 이틀째부터 2바퀴씩 돌아야지 마지막 날 7바퀴는 무리 아냐?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통해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때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잘 순종하던 때가 없었다. 누구 말마따나 군기가 바짝 들어서? 문제는 오래 가지 않았다!

34. 홍해를 건넌 일과 여리고성을 점령한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한 일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서 발견한 핑계거리(이스라엘의 울부짖음, 소리 지름 - 마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활동하신 것처럼 보임):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심, 하나님을 처음 알아갈 때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자신을 보여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어릴 때 행하는 순종의 열매를 더 큰 것으로 주신다. 고함소리에 성이 무너진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하심, 우리의 기도 때문에 무언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기도 때문에 이루어진 것처럼 해주시기 때문이다. ‘기도하니까 이렇게 되더라’ 해서 공식처럼 되어가는 것은 나쁘다. 우리 아버지에게 이런 선물을 사드리면 우리 아버지는 그냥 계시지 않는다 하면서 선물을 자꾸 하는 것은 자녀의 도리가 아니다

35. 가나안 정복 시대를 간단하게 압축하더니 32절도 그렇다. 32절은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선지자들의 시대, 즉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 이스라엘 역사 전체(말하자면 구약의 끝). 결국 11장의 문맥은 창조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을 ‘창조의 회복에 대한 상징’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36. 사사는 전체 15명인데(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바락,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엘리, 사무엘: 사무엘의 두 아들도 사사라고는 하지만 제외) 32절의 네 명(사무엘은 여기서 선지자로 취급됨)이 왜 대표인가?

    이 시대의 히브리 역사를 요약한 삼상 12:8-11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37. 삿 6장에서 기드온(여룹바알)의 행위에 대하여 자랑할만한 것과 비난할만한 것들을 찾아보자.

    1) 밀을 포도주 틀에서: 적에게 들킬 것이 두려워서 몰래 타작하는 행위
    2) 하나님께 반항 비슷한 말을 함: 대체로 말이 많음
    3) 제일 작은 자: 겸손한 표현이라기보다는 핑계거리나 원망에 가깝다.
    4) 표징을 구함: 하나님께 말씀하시면 군소리 없이 ‘아멘’ 해야지?
    5)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을 보고 죽음을 생각함
    6) 밤에 우상을 제거
    7) 이적을 구함 2개 (하나님을 시험함) double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칭찬하기보다는 오히려 지도자로서 모자라는 듯한 느낌이다. 기드온의 위대함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일들을 기드온의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는 것이 성경이다.

38. 바락(베단)은 네 번째 사사 드보라의 명을 받고 20년 동안 심히 학대를 했던 가나안 왕 야빈과 싸운 사람이다. 그가 명예에 결정적인 흠을 남긴 것은 무엇인가?

    가서 싸우라는데 용기가 없어서 사사가 반드시 함께 가주어야 한다고 요청한 것 때문에 야엘이라는 여자가 공을 세움

39. 삼손의 일생은 성공한 삶인가? 실패한 삶인가? 기준은 무엇인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로 일생을 망쳐버림, 사람의 눈에는 비록 실패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것이라면 성공적인 인생이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이루었느냐에 있다. 삼손의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로 적합한 요인은 무엇일까? 신앙적으로 위대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극적인 반전과 초인적인 영웅담 외에 연애담까지 있으므로.

40. 서자 출신으로 쫓겨났다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입다가 애국지사라기보다는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불릴만한 사건은 무엇인가?

    어려운 서원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다.

41.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 기드온, 다윗,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해서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아버지의 위대함과 정 반대인 아들을 두었음: 위대한 아버지에게서 위대한 아들이 나온 경우는 거의 없다. 위대한 어머니에게서 위대한 아들이 나온 경우는 많다. 아버지가 위대하더라도 아들들에게 바른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차선책으로 부인을 잘 만나든지.

42. 다음 각각의 표현에 해당하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여호수아, 사사들, 다윗
    믿음으로 의를 행하기도 하며: 사사들, 사무엘(삼상 12:3-5, 23), 다윗(삼하 8:15)
    믿음으로 약속을 받기도 하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구원을 경험한 사사나, 왕들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다니엘(단 6), 다윗(삼상 17:34-37)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단 3)
    믿음으로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다윗(사울로부터), 엘리야(이세벨), 엘리사(여호람), 예레미야(여호야김)
    믿음으로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기드온, 삼손, 에스더
    믿음으로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다윗, 요나단, 등등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사르밧 과부(왕상 17), 수넴 여인(왕하 4:17-), 나인성 과부, 마르다와 마리아, 도르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믿음으로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성경에는 없으나 마카비 2서에 예가 있다(어머니와 7 아들, 등).
    믿음으로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예레미야(렘 20:2-7)
    믿음으로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 스데반, 이사야(외경 ‘이사야의 승천’에 따르면 므낫세의 치하에서 톱에 잘려 순교하였다고 한다)

43.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다(38, =세상이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음(39).

44. 39절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은 33절과 다른가?

    39: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함
    33:개인적인 작은 약속들: 크게 보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한 사람들이다(13).

45. 40절의 ‘이는’이란 말은 40절이 39절의 이유를 말한다는 뜻이다. 저희가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한 이유가 우리(신약의 성도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란 말이다. 만약에 우리가 더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저희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모든 고생이 헛것이 되고 만다(=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함). 믿음의 선진들이 누리지 못한 것, 신약의 성도들이 누리는 더 좋은 것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 그리스도(조상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의 실체):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과 이미 오신 메시야를 품고 사는 사람들,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고 산 사람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성도는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46.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저들보다 뛰어나다는 뜻일까?

    끝나지 않은 믿음의 행렬에 우리도 추가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을 계주의 마지막 주자인 것처럼 여기고(12장과 연결해서 생각할 볼 때) 이 믿음에 대열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구원역사를 온전케 할 것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앞서 간 많은 선진들이,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 우리를 보고 얼마나 부러워할까?

47. 저자가 말하는 믿음의 삶이란 복을 누리는 것인가 고난을 당하는 것인가?

    궁극적으로 영원한 복을 누리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는 오히려 희생하고 순교하는 삶이 될 수도 있다. 믿음을 따라 죽을 때는 죽을 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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