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장


1. 10장은 7~9장에 이르는 장황한 논증(율법에 비해서 탁월한 예수)을 정리하는 셈이다. 율법의 특징을 찾아서 예수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보자(1-9절과 10-18이 대조를 이룬다).

    1)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참 형상)
    2) 해마다 늘 드려야 함(↔한번으로 완성 14)
    3) 온전한 사죄의 능력이 없음(2, 4)
    4) 죄를 생각나게 함
    5)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함(8)
    6) 폐지될 것(9)
    정리하면 율법은 그림자(불완전함)요 예수는 실체이다.

2. 죄를 없애지 못하는(언제든지 온전케 = 결코 온전케, 1, 11) 황소와 염소의 피를 왜 매년 드리라고 했는가?

    예수의 피와 비교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 당시에는 일시적이긴 하나 유일한 방법이었다(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음). 지금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자동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마누라는 빌려줘도 자전거는 못 빌려준다’고 했다. 예수와 비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3. 유대인들이 드렸던 제사는 비록 완전하지 못하여 매년 드려야 했지만 나름대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임시로나마 사죄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른 유익이 있었다면? 그 점에서 예수라는 제물과 어떻게 다른가?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3,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용서를 받기 위하여 이렇게 노력해야 한다) ↔ 예수의 죽음은 단 한번으로 하나님께서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않게 해버렸다.

4. 구약의 유대인들은 절기가 되거나 스스로 범죄했다고 여기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제사를 드렸다. 힘은 들지만 제사를 드리고 나면 무언가 용서를 받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의식을 중시하는 천주교인들처럼). 반면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는 절차가 너무 쉬워서 용서받은 것을 실감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죄를 경시하는 경향도 있다. 어느 방식이 더 나을까?

    형식을 중시하는 교제냐(가령, 중매 방식의 교제처럼)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인격적 교제냐(연애방식)의 차이(즉 삶의 현장에서 결단하는 자세,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삶)와 같다. 처음에는 형식을 중시하더라도(저차원, 미성숙) 나중에는 인격적인 만남(성숙된 교제)으로 나아가야 한다.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1) → 해마다 같은 제사를 늘 드려도

5.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들어오려면(5) 무엇이 필요한가?

    몸(우리가 옷을 입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구약의 모든 제사와 예물의 실체이며(5), 희생 제사에 드려질 진짜 제물이다.

6. 구약의 오대 제사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이다. 이 중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어느 것인가?

    전부: 5절에 사용된 ‘제사’(제바흐)는 동물 희생 제사를 뜻하고, ‘예물’은 주로 곡물 제사를 가리킨다. 6절의 번제와 속죄제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제사는 동일하게 그림자로서 온전하지 못했다. ‘전체로 번제함’이란 제물 전체를 태워서(번제) 드리는 자원제를 말한다. 화목제와 속건(죄)제는 번제로(태워서) 드리지만 전체를 사르지는 않았다. 일부는 제사장(속죄제)의 양식으로 쓰고, 일부는 제사 드린 사람과 함께 나누었다(화목제).

7. 하나님께서 제물을 싫어하신 예는 구약에도 많이 있다. 제사와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 자신인데 드리라고 해놓고서는 왜 기뻐하지 않는가(5-8)?

    임시로 속죄하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는 못하고 그나마 마음이 떠나버린 제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물 자체보다 마음을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해하지 못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8.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 성경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다. 신약은 오신 예수에 대한 기록이라면 구약은 오실 예수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이 다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대로 사셨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더라는 표현과(마 1:22, 2:15, 2:23, 4:14, 8:17, 12:21, 13:35, 21:4, 26:56, 막 13:4, 14:49, 눅 21:7, 요 12:38, 행 4:28, 골 1:25) 성경(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더라(요 13:18, 15:25, 17:12, 18:9, 18:32, 19:24, 19:28, 19:36, 행 13:27, 13:29)는 표현이 무수한 것이 그 증거이다.

9. 5~7절의 인용 부분은 시 40:6~8의 간접인용(변형)이다. 어느 부분이 빠졌고 어느 부분이 삽입되었는지 비교해보자.

시편 40:6~8 히브리서 10:5~7
(6)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삽입: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5 = 나에게 입힐 옷을 마련하셨습니다). 실제로는 삽입이 아니라 ‘귀’가 ‘몸’으로 해석된 것이다. 70인역에서 그렇게 해석하였다. 어떤 의미의 변화를 통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70인역을 번역하던 학자나 히브리 저자에게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나에게 열린 귀를 주셨도다’ 는 말은 ‘당신이 나를 만지셔서, 내가 듣는 것을 다 순종하나이다’ 라는 뜻이고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는 것은 ‘당신이 나를 만드사 내 몸으로 당신의 뜻을 행케 하셨나이다’ 라는 점에서 그렇게 해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빠짐: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시 40:6),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한글로 보면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원어상으로 보면 삽입이나 변형이다.

    변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7): 시편 저자의 주님의 법에 대한 성실성을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사건에 적용한 것이다.

    구약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일부를 삽입하거나 변형한 이유는 율법의 준수가 최대 과제인 구약적 상황의 시편을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보다는 실체인 예수를 중요하게 여긴 신약적 상황에서 재해석하였기 때문이다.

10. 히브리서 저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9): 첫 것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구약의 제사(5-6, 8)를 가리킨다. 둘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리는 제사이다(10).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린 제사의 탁월성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 한번으로 영원히 완전함(14, 12, 10, 18)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드렸기 때문: 구약의 많은 제사도 실제로는 제물보다 자신을 드리는 것이어야 했다. 제물에 안수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제물과 하나 되어 제물이 대신 죽는다는 뜻에서 제물이 된 짐승에게 안수를 하였다. 구약 시대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다(시 50:8, 사 1:11, 렘 6:20, 암 5:21-22).

12. 제사를 드린 후,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11-14)?

    제사장들은 앉지 못하지만(11, 그 제사가 끝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는 앉아 계신다(13). 예수님의 일이 끝났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제사장은 ‘매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예수는 ‘기다리고 계신다’는 점도 답이 될 수 있다.

13. 5~10절의 예수는 ‘참 제사의 참 제물’이었다. 그러면 11-14절의 예수는?

    제사장으로서의 예수: 예수는 자신을 드리는 제사장이다.

14. 예레미야를 인용하면서(렘 31:33, 34) 왜 이것을 성령의 증거라 하는가(15, 3:7)?

    예레미야의 말씀도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 말씀이 과거의 독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친히 하시는 말씀인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5. 예레미야의 말씀(렘 31:33, 34)을 인용한 의도는 무엇인가?

    새 언약은 마음과 생각에 두는 것이다: 더 이상 율법에 매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결단과 의지가 중요하다. 율법에 따른 제사는 폐지되었다. 이제는 외형적인 형식이나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제사드릴 필요가 없다(18): 구약의 희생 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3). 마치 상처를 치료한다면서 자꾸 건드려서 아프게 하는 것이나 위로한다면서 남의 아픈 기억을 자꾸 건드리는 것처럼! 반면에 예수의 제사는 완벽하게 치료해버려서 건드려도 전혀 아프지 않다. 다시는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제물을 대신 납부하셨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새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셨다.

16. 히브리서를 쓰게 된 동기는 유대인들이 과거의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구약의 의식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의 의식이 빈약해 보인 점과 박해가 심해진 것이 원인일 것이다. 그래서 7장부터 시작된 논증(7:1-10:18)을 마무리 하면서 예수를 배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권면하는지 다음 단락의 핵심 내용을 정돈해보자.

    1) 19~25: 예수를 생각하라.
    2) 26~31: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라.
    3) 32~34: 지난 날을 돌아보라.
    4) 35~39: 담대하고 인내하라.

17. 간이 크다!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니? 대제사장도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허리에 끈을 두르고(죽게 되면 밖에서 끌어내려고) 일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인데 어떻게 이런 담력을 얻었단 말인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19): 짐승의 피도 속하는 일과 정결케 하는데 일시적인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짐승의 피와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 단순하게 피를 속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주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절대 불가능할 때 황제의 아들의 친구가 되어 황제 앞에서 뛰놀게 된 것과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조금 있을까? 아예 황제의 아들로 입양된 셈이다!

    귀신 영화에서 귀신을 물리치려고 들고 나서는 십자가가 짐승의 피라면 예수의 피는 그런 도구가 없어도 귀신이 근접할 수 없도록 사람을 바꾸어 버린 셈이다.

18. ‘휘장이 곧 저의 육체니라?’(20)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마 27:51, 막 15:38, 눅 23:45)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찢어진 휘장이 곧 예수의 죽음이란 뜻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휘장이 제거되었다는 말이다.

19. 휘장이 드리워진 지성소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면서 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어려운 길(=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이었다. 이제 새롭게 열려진 이 길(=찢어진 휘장)은 얼마나 좋은 길인가! 이 휘장이 아담의 범죄,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아담의 범죄: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나님의 공의: 죄지은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 그래도 한 쪽을 터놓았다(비록 일년에 한 차례지만). 언젠가 찢기 위하여 설치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범죄한 이후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에게 그나마 유일한 통로를 주셨고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수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를 제물로 삼아서 이 길마저 훤하게 터버리셨다.

20. 구약의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이 피를 뿌림으로 깨끗하여졌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가?

    위대한 제사장에게서 마음에 뿌림을 받고(예수의 희생) 몸을 맑은 물에 씻었으니(세례).

21. 예수께서 큰 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육체를 찢어서 별도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담대하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산 길을 열어두셨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22-24)?

    믿음(하나님께), 소망(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사랑(형제에 대해서: 선행, 격려, 권함)으로!

22.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우리가 만약 다시 범죄하거나 배교를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23. 모세의 법이 교칙이라면 하나님의 법은 헌법이다. 교칙을 어기고도 죽임을 당했다면 헌법을 어기면 말할 것도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모세의 법을 어긴 자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를 비교하면서 두 세 증인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28)?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는 별도의 증인이 필요 없다. 하나님을 버린 자에게는 예수님과 성령이 증인이시고 예수를 배반하면 하나님과 성령이 증인이시니까. 죄의 경중은 차치(且置)하고 증인도 필요없는 일이다. 예수께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셨다(요 8:17-18, 5:36-37).

24.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짐짓 죄: 고의적인 죄, 배교)이 특히 무서운 이유는? 네 가지 측면에서 답을 찾으라.

    1) 26-27: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28(더 이상의 증인이 필요없다): 확실한 증인이 있다는 것은 피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3) 28-29(법의 경중): 단순하게 우상을 숭배했다는 죄로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4) 30-31(다른 원수도 아닌 하나님의 원수라니):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갚으리라!’(신 32:35)고 하시면 누가 감히 막겠으며 얼마나 엄중한 벌이 선고되겠는가!

25. 어려운 때가 되면 장래에 대한 소망과 지나간 시절의 추억이 꼭 필요해진다. 이런 것이 많아야 흔들림 없이 살 수 있다. 히브리서 독자에게는 어떤 추억과 소망이 있는가?

    추억: 고난의 큰 싸움에서 참은 것(32), 비방(거짓 고소)과 환난(폭력)으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들의 동류로 비난받기도 하고, 갇히기도 하고, 산업을 빼앗기기도 하였지만 기쁘게 이겨내었다. 갇힌 자를 돌아보는 것은 갇힌 자와 동일하게 취급되기 쉬워서 쉬운 일이 아니었단다.
    소망: 상, 하나님의 약속, 영혼의 구원, 더 낫고 영구한 기업

26. 이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 곧 큰 상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하는가?

    담대하고(35), 인내하라(36): 이미 믿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단순한 믿음을 능가하는 담대함(=확신함)과 인내를 요청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참으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3-4)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조금만 더 참으라고 권유한다. ‘담대함’이란 말이 다른 성경에서는 ‘확신함’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이 담대함은 확신에서 나오는 담대함을 의미한다.

27. 권면의 마지막 부분에 하박국을 인용하는(합 2:3-4) 이유가 무엇일까? 비슷한 문제가 있기 때문일텐데... ?

    지체 때문이다(37): 하박국에게는 하나님의 답변이 늦었다. 겨우 주어진 하나님의 답변은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다리던 것은 예수의 재림이었다. 이에 대한 좌절감이 팽배할 때 히브리 저자는 하박국의 예를 들면서 인내하라고 요구한다.

    침륜(?淪): 멸망, 파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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