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2


1. 1:2-3이나 2:1절을 보면 하박국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도전적, 의분에 치를 떠는 모습이다. 불의를 보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열혈 청년이다: 감히 하나님께 이런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다니 버릇이 없다? 이런 도전적인 자세를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대들었다가 복을 받은 사람이 더러 있다.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의 자세나 거창고등학교를 일으킨 전영창 교장......

2. 2:2-20은 하나님의 두 번 째 응답인데 너무 길다. 핵심을 두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

    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의인이 다 죽어 없어지는 것 같아도 그 믿음 때문에 살게 되고 악인은 아무리 득세하는 듯해도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된다. 이걸 믿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14)을 기대하며 여호와만 경배하라(20)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에는 악이 판을 치고 악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 같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면 진리가 승리하고 믿음이 승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사람이 민족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지만 이들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특히 교회사에서 그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서 사용한 갈대아인들에게도 당연히 심판이 있다: 아무리 악이 득세를 해도 길게 보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일 뿐이다.

3.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4)는 이 말씀이 살아서 움직일 때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이 말씀을 믿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대표적인 두 사람은 누구인가?

    사도 바울과 루터: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롬 1:17, 갈 3:11, 히 10:38)는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그렇게 맹렬하게 죽이려고 한 것이나 루터가 이 말씀을 발견하고 로마카톨릭에서 뛰쳐나와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기존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달랐다는 뜻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고 하늘을 나는 것에 비유하면 어떨까?

4.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면, 아니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하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본문에서 말하는 어떤 자세를 가지게 될까?

    더딜지라도 기다린다(3):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임한 재난이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또 간섭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최상이다.

5. 묵시를 기록해야 하는 판이 간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 중요한 글을 기록하는 서판이다. 광고용으로 간판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을 새긴 판처럼 ‘정한 때까지’ 보존용으로 기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달리면서 읽나(참고, 렘 23:21)? 누가 달리지?

    빨리 전해져야 한다: 달린다는 말에 ‘급히 나눈다, 전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파발이 달리듯이 달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보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에 광고판을 세워서 달려가는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큰 판을 세워야 이 내용(4-20)을 다 기록하겠는가!

6.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지만 그들을 바다의 어족같이 취급하던 갈대아인들은 어떻게 되는가(4)?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거짓되다’고 판정했으면 끝났다! 그 다음부터의 얘기는 더 구체적인 언급이다.

7. 신약에는 8복이 있다(마 5:3-10). 우리말과 달리 원어상으로는 ‘복 있도다 ~하는 자여’ 하는 형식이다. 여기서도 비슷한 형식으로 화를 선포한다. ‘화 있도다 ~하는 자여’ 하는 식이다. 몇 가지 화가 있는가?

    5 가지(6-8, 9-11, 12-14, 15-17, 18-20): 다섯 번째 ‘화 있을진저’는 문장의 중간에 있다.

8. 갈대아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끝없는 욕심(5 ↔ 6-8): 밑 빠진 독이다. 온 세상을 정복하여 공의로운 통치를 편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말썽을 부리는 것이다. 권세와 부를 지니고서 욕심 부리지 않고 겸손할 수 있을까? 하나님없이 그럴 수 없다. 잘 하면 개인은 그럴 수가 혹 있을지 모르지만 국가나 단체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것이다.

9. 수 많은 나라를 점령하고, 많은 부를 축적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무거운 짐일 뿐이다: 큰 회사 사장, 대통령,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겠지만 욕심을 버리지 않는한 무거운 짐이다(7). 그러다가 내려앉게 되면 다 빼앗길 수도 있다(8).

10.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사람들이 갈대아인들을 뭐라고 조롱할까(8)?

    까불 때 알아봤다(8, 10): 행한대로 당하게 된다. 구원은 믿음으로 되지만 심판은 행한대로 받는다.

11.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갈대아인들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자들이 왜 높은데 깃들이려 하는가?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 도둑이 지은 집은 도둑이 들어올 수 없도록 더 튼튼하게 짓는다.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정적을 처치하고 권력을 잡은 독재자는 결코 발을 뻗고 자지 못한다.

12.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불의하거나 말거나 벌어놓은 것 잘 간직하고 있으면 평온하고 안전하지 않을까?

    영혼의 평온함은 그런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담의 돌과 들보가 합창을 해대는데 무슨 평안이 있을까?

13. 피로 건축한 성읍은 불에 탈 것이며 불의로 건축한 성읍은 헛된 일로 곤비케 될 것이다(12-13). 어떤 나라와 대조적인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나는 나라다. 1:17절의 질문에 대한 직설적인 대답인 셈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나라는 바다에 물이 가득찬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한 나라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14. 친해도 한 잔, 성질나도 한 잔, 술이라는 게 참으로 요상한 것이다. 좋은 것이면 혼자 마시지 화가 난다고 술을 억지로 먹여서 뭘 하나?

    하체(수치)를 드러낸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을 억지로 먹여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갈대아인들이 그랬다는 것은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케하고 음란을 조장한 것에 대한 비유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강제로 잔을 마시게 할 것이다(16). 제대로 한 번 마셔봐라!

15. 갈대아인을 들어서 유다를 심판하고, 또 다른 민족을 통해서 갈대아인의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만세 전부터 계시는 주(1:12)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하시지는 않을 테니까.

    세상이 여호와를 아는 것(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하나님은 왜 이토록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아름다운 교제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아담이 범죄하여 이 계획에 차질을 빚었을 지라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행복이기 때문이다(호 6:3, 잠 9:10, 사 11:9, 렘 9:24, 렘 24:7, 호 4:1). 어차피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너무나 불안정한 행복이다. 태풍이 불어도 세상이 조금만 흔들려도 깨어지기 쉬운 유리 그릇 같은 행복일 뿐이다.

16. 갈대아인들의 잘못이 많기는 하겠지만 굳이 ‘레바논에 행한 강포’를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레바논이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하여 잔해한 것’은 갈대아인들이 행한 폭력과 학살에 대한 비유다. 레바논이 번성하는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참고, 사 14:8, 신 1:7, 수 1:4).

17. 우상은 가르치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다. 움직이지도 못한다. 뻔한 얘기를 굳이 여기서 되풀이 하는 의도가 뭘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20절과 대비시키려는 것이다. 말 못하는 우상과 달리 하나님은 일어나시면 하늘과 땅을 뒤엎을 것이니(3장) ‘까불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