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1. 누가 범죄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반적으로는 비난부터 하기 쉽다. 이런 경우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 두 가지는 무엇인가?

    온유함과 두려움(=자기 성찰): 범죄한 사람에게는 온유함으로, 자기 자신에게는 냉철함으로! 구린 부분이 있는 사람이 더 타인에게 과격하기 쉽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범죄한 사람을 온유함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2. 칭찬은 대단한 위력이 있다. 권면하면서도 적절하게 칭찬하면 쉽게 권면을 받아들인다. 바울은 무슨 말로 갈라디아 성도들을 은근히 칭찬하는가?

    신령한 너희는: 신령하다고 말함으로 신령한 짓만 하도록 강요하는 셈이다. 신령하지 않는 사람도 이런 말을 들으면 스스로 신령해지려고 하는 법이다.

3. 짐을 서로 지는 것은 형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가?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형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눔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4. 3절을 2절과 연관시킨다면 어떤 자가 스스로 속이는 자인가?

    형제의 짐을 나누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이 뭔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자는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 된 줄로 여긴다면 스스로 속이는 자이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바로 스스로 속이는 자이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없이 종교적인 의무에만 충실한 사람이다.

5.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다면 결국은 무엇과 같은가?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남에게 자랑할만한 것은 없다! 3절을 4절과 연관시킨다면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되지도 않은 것을 열심히 자랑했다. 그러지 말고 스스로 해야할 일을 잘 감당하라(4).

6. 2-5절의 결론은 5절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자기 일이나 잘 해라: ‘형제의 짐을 지라. 형제를 돕지는 않고 율법대로 잘 행하고 있다고 자랑하지 말라. 성도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잘 감당하라.’

7. 6-10절은 성도들이 자신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자.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 하라(6),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10), 심는대로 거두리라(7, 이 구절이 고후 9:6에서 헌금을 권하면서 사용되었다): 실제로 바울은 당시에 헌금에 관심이 많았다.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 교회를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2:10), 예루살렘 공회에서도 결정한 사항이었다. 3차 전도여행에서 그렇게 소망했던 로마로 바로 가지 않고 굳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도 바로 이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8. 6절은 선생님께 부지런히 선물하라는 말일까?

    여기서 가르치는 자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필요를 채우라는 의미라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도 사역에 동참(지원)하는 것이다. 단순한 감사의 표시가 아니다.

9. ‘스스로 속이다’는 말은 ‘자신을 속이다’는 말인데 우리말 어법대로는 ‘속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조롱당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 리가 없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을 수 없는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일(8): 심은 대로 거둘 생각을 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육체를 심고 영생을 거두려 하는 자(율법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재물을 선한 곳에 사용하지 않으면서 재물의 복을 누리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이다.

10.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는 일은 아주 많다. 예를 들어보고, 그럴 때 어떻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지 알아보자.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와주었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비난할 때: 귀한 손님이라고 없는 돈을 빌려가며 대접을 잘 했더니 ‘자기들은 평소에 이렇게 잘 먹는가 보다’라고 말할 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께서 거두게 하실 것이다.

11. 1-10을 보면 구약의 어느 성경을 보는 것 같은가? 전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성령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잠언: 성령의 열매가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다.

12. 왜 ‘자기 손으로,’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는가?

    간절한 부탁을 의미한다: 힘들고 어렵게 수고하고 있음을 알고 잘 부탁한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든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꾸중하는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선생님을 이렇게 고생시켜도 되느냐고 책망하는 셈이다.

13. 할례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어떻게 비난하는가(12절에서 3가지를 지적하라)?

    육체의 모양을 중시하는 자, 자원이나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게 하는 것,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피하려는 수단으로 할례를 주장하는 것: 그렇다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편지를 마치면서도 강하게 비난하는 것은 처음과 마찬가지다.

14. 할례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는 말을 직접 들었다면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할례 받은 것이 자랑스럽다면 율법을 다 지켜라: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율법의 나머지 규정도 다 지켜야 말이 되는 것 아니냐?

15.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은 전혀 자랑할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자랑하고 싶다면 무엇을 자랑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라. 이건 내 자랑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자랑하고 싶은 것은 내가 ‘새로 지음 받은 자’라는 것이다(15).

16. 14절 후반절에 따르면 십자가에 죽은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도 죽었고 나도 죽었다(14b): 내 편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편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 세상과 나는 완전히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이다. 세속적인 모든 욕심을 다 버렸다,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다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니 할례를 받든, 아니 받든그게 무슨 상관이냐? 의미있는 것은 십자가 뿐이다. 그런 십자가를 버리고 할례를 자랑거리로 삼다니!

17. ‘이 규례를 행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16). 또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자.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15): 혈통을 따른 이스라엘이 아니라 새언약을 따라 사는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바란다.

18. ‘나를 괴롭게 말라’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더 이상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빠져들지 말라: 바울의 괴로움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흔들림 때문이지.

19. 바울이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수도 없이 매를 맞기도 하고 돌에 맞기도 한 흔적이 몸에 많이 있었다. 영광의 상처인 셈인데 이것을 예수의 흔적(낙인)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은 은연중 이것을 무엇과 대비시키고 있는 걸까?

    율법주의자들의 할례: 그들은 할례를 그렇게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차라리 내 몸에 있는 흔적들이 오히려 더 귀한 것이다. 이런 수고에 동참하지 못할망정 엉뚱한 자랑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꾸중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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