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0


1. 큰 무리가 에스라에게 모여온 것은 에스라의 어떤 점 때문일까?

    자기 죄가 아닌데도 자기가 범죄한 것처럼 애통하는 점(9:6-15), 제사장일 뿐 아니라 정치적, 사법적 권한을 지닌 지도자가(7:25-26) 권력을 행사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을 보인 점: 진정한 영적 지도자는 권력을 다 쓰지 않는데서 진정한 존경을 받는다(고전 9:18).

2. 에스라의 통회하는 모습을 본 백성들이 스스로 결단하고 방법을 제시했다(2-3). 이런 과정을 보면서 지도자가 지녀야 할 교훈을 얻는다면?

    인내하면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할 수 있다: 에스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위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므로 이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범죄한 백성들에게 인내를 베푼 셈이 되고 결과적으로 자발적인 회개를 이끌어 내게 되었다. 영적 지도자는 백성들을 지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3. 빛나는 주연배우 곁에 조연배우가 있듯이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있었고,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있었다. 바울에게는 누가를 위시한 많은 조력자가 있었다. 위대한 에스라에게는 누가 있는가?

    스가냐가 있었네(2)!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조력자를 만날 수 있다. 스가냐는 그런 면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자였다.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는 에스라에게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신 조력자들을 붙여주셨다. 스가냐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스로 지도자가 될 능력은 없지만 지도자를 도와서 일이 되게 할 열심은 있다. 존경하고 따를 지도자만 있다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조연이 주연을 더욱 빛나게 하기도 한다. ‘빛나는 조연’이다.

4.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미 결혼해서 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을 내보내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믿지 않는 이웃, 심지어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살기도 하는(=신앙이 절대적인 명제가 되지 못한) 오늘날의 관점, 특히 인권의 수위가 높아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는 것이 절대절명의 과제인 당시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이지만 자업자득이라고 봐야 한다.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부인이나 아이들이 철저하게 개종하는 것은 안 될까? 그런 방법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5. 엘리아십(느 3:1)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이란 성전의 양쪽에 있던 방으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봉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그 방에 왜 들어갔지? 거기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임시숙소로 돌아온 셈이다: 온 백성들로부터 회개에 합당한 행동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전에서 물러나왔다. 최고 지도자였으니 그 방에 잠시 모셔진 셈이다. 말하자면 ‘농성을 풀고 일단 임시숙소로 돌아온 셈’인데 돌아와서도 여전히 금식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6. 여러 가지 단체가 있을 수 있지만 단체의 이름은 가능하면 아름답게 짓는 법이다. 사로잡혔던 자의 회? 무슨 단체 이름이 이럴까?

    우리말의 어감은 그렇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대단히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온갖 고난을 각오하고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자부심이 담긴 표현이었기에 에스라서에는 자주 사용되었다(4:1, 6:16,19,20, 8:35, 9:4, 10:6,7,8,16).

7. 백성들이 에스라의 말에 순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일까, 아니면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에스라의 권력(7:26)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하나님을 향한 회개: 에스라는 권력자로 백성들 앞에 나선 적이 없다. 먼저 통회하고 자원하는 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 백성들도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이었다(9). 8절이 악독한 왕의 말처럼 보이지만 원어상으로는 느낌이 좀 다르다. 에스라가 왕으로부터 정치적인 권력을 받았지만 백성들에게 전한 말은 전부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8절의 ‘적몰(아나쉬 → 하람)’이나 ‘쫓아내리라(이바델)’는 말도 종교적인 의미이지 세속권력을 이용한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왕에게 받은 권력으로는 총독이었지만 백성들 앞에서는 제사장으로만 활동했다(16)는 의미다.

8. 영화나 소설의 슬픈 장면에서는 꼭 비가 내리던데 대부분 작가나 감독의 의도적인 설정이다. 온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개할 때에 하필이면 큰 비가 내렸다고 하는 것은 에스라가 문학적인 기질을 발휘하는 건가?

    성경은 문학이 아니다: 성경도 어떤 점에서는 훌륭한 문학 작품이기는 하나 문학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실에 바탕을 둔 기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백성들이 9월 20일에 모였는데 태양력으로 하면 12월로 한 겨울이며 동시에 우기다(지중해성 기후). 특별히 비가 많이 온 것을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로 생각했던 모양이다(14).

9. 기한을 달라고 할 것도 없이 개인적으로 내보낼 사람을 다 내어보내 버리면 끝나는 일 아닌가? 개인적인 범죄행위로만 처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일에 방백, 장로, 재판장, 제사장은(14) 어떤 역할을 했을까?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행정, 사법, 종교적인 절차를 맡은 셈: 방백은 조사하고 장로는 증인내지 보증, 재판장은 판결, 제사장은 정결예식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런 절차를 밟은 것은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러면 이방인과 결혼했음에도 무죄로 판결이 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10. 반대파는 어디에든 있게 마련인데 그럼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의 힘이 약했기 때문일까?

    에스라의 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제시한 방법에 대한 다른 의견이었을 것이다.

11. 족장들이 조사하는 데만 3달이 걸렸다(16-17). 범죄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기에 이만큼 걸렸을까?

    아래에 기록된 숫자는 110명 뿐이다: 무죄로 판결을 받은 자들도 있었을 테니까 조사 대상은 이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지만 여러 족장들이 나누어서 조사한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일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12. 제대로 끝을 못 맺은 것 같은데?

    꼭 말을 다 해야 알아듣나? 당연한 말은 생략하는 것이 편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마무리를 해주는 것이 좋겠는데...

13. 자녀까지 낳은 아내를 기어코 돌려보내야만 했을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범죄라는 것을 안 이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회개는 그런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이런 고통을 감내하려는 의지가 약하다. 혹시 잘못이 있으면 쉬쉬하고 덮어두려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