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9


1. 새로운 지도자인 에스라가 도착하자마자 백성들의 잘못을 일러바친 방백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까?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떨며(4):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멋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방법을 찾고 있는데 에스라라는 새 지도자가 왔다. 율법에 정통할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지도자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을까?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바른 길을 주시하며 방법을 찾는 자들이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이었다(4).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에스라를 보내주셨다.

2. 이스라엘이 어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가?

    가나안 족속과 섞이지 말라는 명령(신 7:1-4): 이들과 통혼하는 것이 곧 가증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거듭 거듭 강조했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빠져들까? 하나님 아닌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눈을 돌리는 순간 구별된 삶은 어려워진다. 신앙의 열정을 품고 이 땅으로 돌아온지 거의 두 세대가 지났다. 열정을 잃어버릴 때가 되기도 했다. 가나안 정착 초기에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울타리를 세워 구별된 민족으로 세우셨지만 실패했다. 엄청난 징계를 겪은 이제는 울타리도 없이 다른 민족과 어울려 살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도록 하셨지만 또 실패한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보다 더 어려운 현실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3. 이스라엘의 범죄행위에서 특별히 더 걱정스러운 부분은 무엇인가?

    지도자들이 앞장 선 점: 방백이나 두목들이 그랬다는 것도 문제지만 율법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인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마저 그랬으니 희망이 없다. 백성들이 좀 허물어져도 지도자들이 분명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미국 사회가 그렇게 혼탁해 보여도 튼튼한 이유는 지도 계층은 아주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살아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점에서 지도자는 좀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4. 교회의 이런 저런 나쁜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더구나 다른 교회의 나쁜 소식은?

    자신의 일처럼 마음이 아프면 자신도 한 교회의 지체다: 자기가 속한 교회는 아니지만 ‘어느 교회의 부목사가 담임목사를 폭행 했단다? 유명한 목사님이 성추행을 했단다?’ 이런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히고 답답하면 거룩한 공의회(=하나의 교회)의 한 지체인 증거다. 자신이 지은 죄도 아닌데 자신이 지은 것처럼 부끄럽다(6).

5. 에스라가 왜 그렇게 기가 막히는지 설명을 해보자.

    수 십년에 걸친(바벨론 포로에서 에스라의 귀환까지는 거의 130년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용서가 무위로 돌아가는 일이다. 에스라 자기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신실한 지도자에게는 개인의 영욕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망치는 이런 일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이다. 억장이 다 무너지는 셈이다. 자신을 버려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매달렸던 모세(출 32:32)나 민족을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던 에스더(에 4:16)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보면 바사에서부터 온갖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그 먼 길을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인데 그 꿈이 깨끗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전자에 비하면 작은 아픔이다.

6. 에스라가 이렇게 가슴 아파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조상들의 잘못(7)과 하나님의 용서(8-9), 그걸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10):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처럼 조상들의 잘못이 무엇이며 어떤 징계를 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도 교회사를 알아야 한다. 좋은 예뿐만 아니라 잘못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얼마나 참혹한 짓을 저질렀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교회를 존속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7. ‘오늘날 같으니이다’라는 것은 오늘날 어떻게 됐다는 말인가?

    나라도 잃은 채 포로로 잡혀갔고, 일부는 겨우 돌아왔지만 여전히 바사의 변방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선민이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는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8. 8절의 ‘박힌 못’이란 말은 원어상으로 ‘못’일 수도 있지만 주로 ‘말뚝’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쪽이 좋을지 생각해보자.

    ‘못’이라면 ‘성전을 튼튼하게 지키는 못’이 되겠고(그러면 ‘그 거룩한 처소’는 성전이 된다) ‘말뚝’이라면 가나안 땅에 튼튼한 주거지를 주셨다(그러면 ‘그 거룩한 처소’는 가나안 땅이 된다)는 뜻이 된다. 문맥상으로는 후자가 적절하다. 8절 후반절에도 일부가 돌아온 것을 언급하고 있고 관주에도 7:28을 보란다.

9.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지만 노예처럼 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다니엘, 모르드개, 에스더,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인물들이 나오고, 여호야긴도 풀려나서 왕으로 대접을 받았는데(왕하 25:27-30)? 돌아가도 좋다고 하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백성이 많았던 모양인데?

    아무리 자유를 누리고 잘 먹고 편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쫓겨나서 이방 왕을 섬기며 사는 것은 ‘종노릇하는 것’이며(8) ‘노예’이며(9) ‘복역’하는 것(9)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없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불쌍한 거지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10. 종살이 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잠간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나 ‘조금 소성’케 하셨다는 것(8)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건가?

    잘 하면 크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것: 제대로 용서받을 기회를 주셨는데 우리가 이 모양이라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11. 11-12절의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인데(신 7:1-3) 왜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라고 할까?

    처음에는 모세를 통해서 주셨지만 후대의 다른 선지자들도 동일한 말씀을 계속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모세 시대에 한번으로 끝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12. 더러운 땅이라고? 하나님께서 골라주신 땅은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셨는데(겔 20:6)?

    땅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부정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11b): 가나안인들의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성적 타락으로 더러운 땅으로 여겨진 것이다. 마치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더러워지는 것처럼(레 12:2, 20:21).

13. 에스라가 보기에(13) 이스라엘이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죽어 마땅할 자를 용서해주신 셈이니: 지금 이스라엘이 이만큼 남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또 이런 죄를 짓고 있으니 기가 막히고, 더 이상 할 말도 없다는 것이다. 또 다시 징계를 받아 전원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14).

14.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도 당연하다는 뜻: 의롭다는 것은 공정하게 판결을 내린다는 뜻이다. 죽을 죄를 지은 죄인에게 의로운 재판장이라면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자비를 베푼다면 자비로운 재판장은 될지언정 결코 의로운 재판장은 아니다. 그러니까 에스라는 용서해달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들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5. 에스라의 회개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무엇일까?

    민족의 잘못을 자신이 짊어진 기도(10): 당대 동족들의 죄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마저(13)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애통하는 것이다. 민족의 아픔이나 교회의 어려움을 얼마나 자기의 죄로 여기고 안타까워하는가? 남의 일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 혼자 괜찮으면 괜찮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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