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8


1.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2차 귀환자(4-14)를 1차 귀환자(2:63-65)와 비교하면 규모가 어떠한가?

    아주 적다: 1차 귀환자의 숫자는 42,360 + 7,337 + 200 = 49,897 명인데 2차 귀환자는 1,496(150 + 200 + 300 + 50 + 70 + 80 + 218 + 160 + 28 + 160 +28 + 110 +60 + 70) + 38 + 220 = 1,754 명으로 1/30이다. 포로로 갔던 모든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교회 일이든 무슨 일이든 앞장 서서 이끌어가는 무리는 항상 소수다. 다수가 앞장 서서 헌신하는 기적같은 일은 정말 특별한 은혜를 받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2. 에스라가 이끌고 온 족장들(1)의 명단은 어디에 있는가?

    ‘00 자손 중에서는’ 이란 표현 다음에 나오는 사람이 족장이다. 3절의 ‘스가랴’, 4절의 ‘엘여호에내’ 등이다. 그렇게 보면 5절의 스가냐 자손의 족장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10절의 요시뱌도).

3. 스가냐 자손이 두 번 나올 뿐만 아니라(3, 5) 5절에만 야하시엘의 아들의 이름이 없다? 뭔가 이상하다? 다른 번역본을 참고로 하자.

    많은 역본들은 5절을 ‘삿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 스가냐’라고 한다. 70인 역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문에 ‘삿두'가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2장에 나오는 가족별 이름 중에서 삿두가 여기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10절에도 같은 현상이 보인다. 그래서 10절도 ’(바니 가족 중에서는) 요시바의 아들 슬로밋‘으로 본다.

4. 아하와 강가에서 삼일동안 장막에 머무른 이유는 뭘까?

    출발 준비: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레위인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레위인들은 왜 자원하지 않았을까? 알 수는 없지만 성전에서 제사장에게 수종들며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지 않았던 본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았던 탓 아닐까? 마치 교회 출석도 잊은 채 그냥 사느라고 바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살던 레위인들을 각성시킨 셈 아닐까?

5. 자원하지 않는 레위인들을 억지로 데려 가야 하나(16-17)?

    최소한 권면은 해야지: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선한 손으로 도우신다(18).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탓이다.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잊어서는 안된다.

6. 에스라가 잇도에게 사람을 보낸 결과로 데려온 핵심인물은 누구인가?

    세레뱌와 하사뱌와 여사야: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이 사람들이었는데 딸린 식구들마저 함께 왔다. 18절의 ‘한 명철한 사람’은 세레뱌를 가리킨다. 하사뱌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24절에 보면 제사장의 두목 중의 한 사람이다.

7. 레위인들이 귀환하지 않으려고 하는 판국에 레위인들을 돕던 느디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많이 동행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17절에 에스라가 사람을 보내면서 ‘할 말’을 일러주었다. 아마 모종의 약속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1차 귀환 때의 숫자와 비교하면(2:58) 정말 많은 숫자다. 짐작컨대, 포로로 가면서도 신분제도를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아서(왕족이나 제사장, 레위인) 신분의 변화에 대한 약속(예컨대, 종 → 자유민)이 있지 않았을까?

8.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금식은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고백이 바로 기도다. 에스라는 군대의 호위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9. 우리도 에스라처럼 왕의 도움을 모두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야 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있다: 왕이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다니! 세상은 이런 사람을 ‘너무 순진하다’, ‘세상 물정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에스라의 신앙은 너무나 맑고 깨끗하다. 왕과의 관계, 재물을 다루는 태도, 레위인을 구하는 모습 등등. 그러나 매사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느 2:7-9). 누가 더 잘 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 에스라의 마음 상태가 그러했다는 얘기다. 교회당에 피뢰침을 꽂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밥을 먹지 않아야 할 때가 있기는 있지만 평상시에는 먹어야 한다.

10. ‘제사장의 두목’이 뭐야? 무엇이라고 하면 좋을까? 우두머리?

    어른이 어떨까?

11. 장정만 2,000명이 안 되는 무리가 군사도 없이 그 먼 길을 가야 한다. 이 행렬에 대한 소문 중에 절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비밀이 있다면?

    엄청난 은과 금을 운반한다는 사실: 길에서 매복하다가 상인들을 습격하는 도적떼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31).

12. 헌납한 은과 금이 적지 않다. 금이 100 달란트면 3.4톤이고 1,000다릭은 8.4톤이다. 엄청나게 많은 성전기물을 다루는 일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항상 함께 나타난다(24, 29-30, 33). (참고로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 형제 십인은 제사장이 아니라 레위인이다(15-20). 그러니까 24절의 ‘곧’은 ‘과’로 고치는 것이 옳다.) 은과 금을 맡겨서 운반하려고 하는 일에 이렇게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따로 세우고 함께 일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정을 다루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많다. 내부에도, 외부에도 언제든지 도적이 있을 수 있다. 성전기물 운반은 오늘날 현금수송보다 더 어려운 일 일걸! 담당자 선택(24), 임무 부여(25, 28-29), 정확한 계수(26-27, 33-34), 즉시 기록(34)함으로 철저한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13. 재물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에스라가 칭찬을 들을만한 일이 또 있는가?

    자신이 직접 관리하지 않았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순간적인 권력은 그럴 수도 있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돈에서 나오는 권력이다. 이건 꽤 오래 간다. 돈을 장악해야 실제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힘을 가져야 자신이 뜻하는 선한 일에도 그만큼 영향력이 클텐데 에스라는 이런 돈을 직접 관리하지 않았고 단순하게 전달했을 뿐이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그랬다.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많이 거두었지만 각 교회 대표들이 지참하게 해서(행 20:4) 전달했을 뿐이다. 그래도 바울이 돈을 많이 가졌다고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총독이 껄떡거렸으니(행 24:25-26)!

14. 에스라 일행은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났다(7:9). 이것은 바벨론을 벗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처소에서 떠났다는 말이다. 일차 집결지가 아하와 강변이었다. 여기서 재차 출발한 날이 십 이일이었다. 그 동안 뭘 했는가?

    출발 준비와 레위인을 불러모으는 일: 인원 점검에 사흘이 걸렸고 레위인들을 불러 모으는 일에 9일에 걸린 셈이다. 물론 그 사이에 금식도 하고 다른 준비도 했겠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을 찾고 준비시키는 일이다. 신앙의 회복은 성전제사를 회복하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 레위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에스라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사람을 준비하지 않고 제도만 바꾸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15. 엄청난 양의 성전기물을 인수 책임을 맡은 사람은 므레못이다. 그러면 엘르아살과 요사밧과 노아댜는 무슨 일을 맡은 걸까(33-34)?

    엘르아살은 제사장이니까 입회인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레위인이니까 실무 담당이다. 기록하고 인수해서 보관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회사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적지 않은 재정사고가 일어난다고 한다. 역할을 분담하고 함께 담당하는 것이 이런 류의 사고를 줄이는 중요한 요인일 수도 있다.

16. 우리말 욕 중에는 뜻을 풀이하면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이란 게 있다(還鄕). 고향으로 돌아온 게 그렇게 수치스러웠던가? 남자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해서 이중으로 수난을 당한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욕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자주 쓰이는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란 표현(35)도 이처럼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을 것이다. 그렇게 수치스러운 말이었을까?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니 아마도 자랑스러운 말 아니었을까? 아마 신앙을 회복한 승리자라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17. 돌아온 자들이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돌아온 이들이 무슨 죄가 많아서 속죄제를 드렸을까?

    포로로 갈 수밖에 없었던 조상들의 죄를 포함하여 자신들의 신실하지 못했음(=하나님 앞에서의 부족함)을 위해서 드렸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훨씬 더 신앙적이었음에도 말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 더 기억한다면 헌신을 다짐하는 번제에 비해서 속죄 제물이 훨씬 적다. 회개보다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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