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2


1.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이제 어디로 돌아왔는가?

    예루살렘과 유다 도: 본래 ‘유다’는 나라의 이름이다. 이제는 바사의 한 ‘도’에 불과하다. ‘각기 본성에’ 라는 말은 ‘유다 도 내에서’ 조상들이 살던 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2. 2절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다공동체의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중에 혹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말하자면 유다의 왕족의 후손이 누구겠느냐는 것이다. 바벨론에서 명목상이지만 왕의 지위를 다시 회복한 것은 여호야긴인데(왕하 25:27-30)?

    스룹바벨: 여호야긴(여고냐)의 손자다.

3. 백성들을 인솔한 지도자 중에 스룹바벨 외에 또 아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느헤미야와 모르드개가 있지만 우리가 아는 느헤미야(1세기 후에 등장함)와 모르드개(에스더가 왕비가 되는 것은 60년 쯤 후의 일)가 아니다. 동명이인이다. 혹시 안면이 있는 이름이 있어도(예수아, 바아나 등) 동명이인이다.

4. 3절에서 19절까지는 가계에 따른 분류지만 20절에서 35절까지는 지역(주로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지역)에 따른 분류다. 왜 이전처럼 지파별로 하지도 않고 더구나 지역별로 분류를 했을까?

    지파 개념이 무너지는 셈이며 더구나 자신의 계보를 잊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 지파라고 해야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대부분이다. 북이스라엘의 10지파는 앗수르에 멸망하면서 이방인과 혼합되어버렸다. 가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3-19) 조상들의 거주지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20-35), 아예 가계도 고향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59-62). 가계나 조상의 거주지를 기억하는 것만도 여호와 신앙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돌아갈 것을 믿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신앙의 추억을 남겨두는 것은 훗날 이들이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참고로, 20절의 ‘깁발’은 느 7:25의 ‘기브온’이 올바른 표기인 것 같고 그렇다면 지명이다. 자신이 어떻게 유대인인지도 모른 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면 엄청난 복음이 들렸다. 함께 귀환하기는 하는데 기쁨을 온전하게 누리지 못한다.

5. 포로로 지내는 와중에 지파별 개념이 흐려졌지만 그래도 가장 분명하게 명맥을 잇는 지파는 어느 지파인가?

    레위(36-42): 아마도 그들이 맡은 특별한 사역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북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자 레위인들이 대거 남쪽 유다로 넘어온(대하 11:16) 덕분에 이들은 여전히 지파로서 생존하고 있는 셈이다. 제사장, 노래하는 자, 문지기 등은 전부 레위 지파가 맡은 역할이다.

6. 돌아온 제사장의 수는 973 + 1,052 + 1,247 + 1,017 = 4,289명이다(36-39). 반면에 이들을 도와야 할 레위인들은 몇 명인가(40-42)?

    341명(74 + 128 + 139): 가분수다. 머리는 엄청 큰데 몸통은 10분의 1도 안 된다. 몸통이 더 커야 정상인데? 제사장이 아닌 레위인들이 왜 이렇게 적었을까? 아마도 그들이 성전에서 하던 일을 가볍게 여긴 탓이 아닐까? 별 볼일 없는(?) 일을 하려고 생활기반을 버리고 그 먼 길을 가야 하나? 아마 이런 갈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목사는 훌륭하고 집사는 보잘 것 없는 머슴일 뿐이라는 생각처럼 교회를 허무는 생각이 또 있을까? 성도가 행하는 모든 일이 거룩한 일이며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셨는데(벧전 2:9)...

7. 레위지파 다음에 잘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43-54). 짐작으로 어떤 사람들일까?

    레위지파의 일을 돕던 이방인 출신들(스 8:20): 가령, 여호수아를 속인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된 것처럼(수 9:23-27) 포로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많다(민 31:27-30, 46). 이름이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이름이 아니라 이방인의 이름이나 이방신과 관련된 이름이 많기 때문이다(느디님, 르신, 아스나, 시스라). ‘느디님’ 은 ‘주어진 자들’이란 뜻으로 레위인들을 돕도록 주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8. 솔로몬의 신복이 일반적인 신하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렇게 따로 분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위치도 앞 쪽에 위치해야 옳다. 고위관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자들이었을까?

    전쟁포로처럼 이방인으로서 귀화한 유대인: ‘신복’이라고 번역된 말(에베드)은 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느디님 사람과 같이 취급되는 것(58)도 이 사람들과 비슷한 신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의 종이고, 이들은 왕궁의 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귀환하는 걸까? 차라리 바사에 그냥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데? 이들도 여호와가 참 신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여기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신앙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자들의 명단만큼이나 명예로운 자들이다.

9.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59)은 페르시아 지역의 이름이다. 여기에서 온 자들은 이스라엘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귀환자의 대열에 끼였을까?

    자신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보면 족보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은 포로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계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이 문제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모와 친척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린 고아가 아니라면 계보를 소홀히 여긴 죄가 크다. 본인들이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이걸 어떡하지? 전쟁 통에도 자신의 학력, 경력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휴대하던데 하물며 스스로 유대인임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10. 족보를 잃어버린 제사장은 어떻게 하나?

    제사장의 권리를 박탈당함(62-63): 우림과 둠밈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던 도구였지만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이 잡혀가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다. 더 이상 이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없게된 것이다. 지성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제사장에게 분배되던 양식이 주지말라는 것이니 제사장의 역할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11.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명인데 노비가 7,337명이면 많은가?

    다른 짐승들의 수를 감안하면 대단히 많은 숫자다: 말 730, 노새 425, 약대 435, 나귀 6,720 이니 요즈음 식으로 하면 가정당 한 대씩 트럭이나 경운기가 있고 머슴이 있는 셈이다. 65절의 ‘노래하는 남녀’는 아마도 부유한 자들이 고용한 음악가일 가능성이 높다. 나름대로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 귀환한 셈이다.

12. 족장들 중에서도 특별히 열심있는 족장들의 어떤 점이 좋아 보이는가?

    예물을 즐거이(68), 역량대로(69) 드림: 아마 자신의 집보다 성전을 먼저 생각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재물을 즐거운 마음으로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으로 드렸다. 능력 이상으로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인의 열심은 그런 측면이 강하지만 하나님은 능력 이상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제물을 깎아주시는 분이시다.

13. 다릭은 페르시아 금화로 8.4g이다. 현재 화폐로 환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대략 계산이라도 해보자.

    61,000다릭 × 8.4g = 512,400g.(15달란트, 136,637돈)이다. 요즈음 금값이 엄청나게 올랐다. 1돈에 20만원으로 환산하면 거의 300억에 가깝다.

14. 본성이 어디길래 이들이 모두 본성에 거하였는가(70)?

    자기들이 본래 거하던 성(their own towns): 그러니까 레위인(제사장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과 성전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느디님 사람들)이 거한 본성은 예루살렘이다. 그 가운데 끼인 ‘백성 몇’은 성전과 관계없이 예루살렘에 거하게 된 사람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본래 고향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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